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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두 가지 변명

2020년 2월 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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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탈린으로 휴가를 갔을 때의 일이다. 시내 오래된 극장에서 <기생충>을 상영하고 있었다. 이미 서울에서 두 번을 봤지만 반가운 마음에 표를 사놓고 극장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옆으로 노숙인 한 사람이 지나갔다. 마침 하릴없이 영화를 기다리느라, 익숙한 몸짓으로 쓰레기를 뒤지는 이 노년의 여성에게 자연히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병들 중 생수가 들어 있는 병은 화단에 따라 버리고, 음료수가 남아 있는 병은 굳이 몇 발 자국 떨어진 하수구 구멍에 비운 뒤 유유히 빈 병들을 수거해 사라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모습은 잔상이 꽤 오래 남았다. 길에서 살아가는 이에게서도 환경을 생각하는 여유와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기대할 수 있다니, 모르긴 몰라도 에스토니아는 교육이나 복지 측면에서 배울 점이 있는 국가겠단 인식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뒤따라온 생각은 아차, 저 한 인물에게서 받은 인상만으로 이 도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검열이었다. 직장인에게 주어진 짧은 휴가 동안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으로 그 나라 전체의 기억을 섣불리 치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자각이다. 모스크바에서 역대 가장 친절한 에어비앤비 집주인을 만났을 때도, 하노이에서 바가지 요금을 씌우는 택시 기사를 경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쓸 때도 나는 이것이 가장 겁난다. 내가 글 안에서 어떤 사물에 대해 일면만으로 함부로 단정 짓거나 편협한 논리로 주장을 전개할까 두렵다. 쉽게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도 글쓰기의 좋은 방법이라지만, 구체화할수록 중언부언 구차해진다는 느낌뿐이다. 글 쓰는 일에 착수를 하고도 문장이 쉬이 이어지지 않거나 불필요하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 데는 대개 이 변명이 뒤따른다. 이것이 글쓰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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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의 엘렌 드제너러스가 자신의 쇼에서 올해의 오스카 시상식을 소재로 개그를 선보이다 구설에 올랐다. 시상식 생중계를 TV로 지켜보며 친분 있는 영화인들에게 문자 연락을 했다는 그는, 마틴 스콜세지에겐 눈썹에 보냈고 로버트 드 니로에겐 문자가 아닌 팩스를 보냈으며 봉준호에겐 그의 통역사에게 문자를 보냈으니 그 통역사는 다시 그 문자를 봉 감독에게 전달했을 거라는 요지의 농담을 했다. 오랜 시간 미국만의 축제였던 오스카에서 외국어영화가 상을 받자 무대에 통역사가 등장해야 했던 이례적인 풍경을 우스갯거리 삼은 것이다. 그가 전에도 종종 인종차별과 관련한 질타를 받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 대목에서 민감한 인지를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은 개연적이다. 스스로 여성이자 동성애자라는 소수자성(Minority)을 지닌 인물이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1세계 백인이라는 측면에서는 또 다른 소수자를 비하한 셈이다.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서울시장 후보였던 녹색당 신지예 공동운영위원장은 지난 해 자신의 트위터에서 문재인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에 대해 비판하며, 한국은 인프라가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도로에 막대한 예산을 뿌려선 안 된다고 말해 단숨에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트위터리안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가 평생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지방 도시 간 이동, 또는 지방에서 서울로의 이동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하니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동안 페미니스트 정치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며 소수자 인권 대변에 앞장 서 왔다. 그러나 인프라가 풍족한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여성으로서 지방 여성들의 불편에 대해서는 무감각에 가까운 태도를 숨기지 못한 셈이다.


글을 쓸 때도 나는 이것이 가장 겁난다. 내가 글 안에서 내가 가진 특권을 특권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갖지 못한 집단에 둔감한 의식과 언사를 내비칠까 두렵다. 일부 소수자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이런 발언을 했을 때 오히려 더 가혹한 혐의가 적용되는 경우들도 종종 봐오지만, 나만은 강박적으로 그 불명예를 피하고 싶다. 글 쓰는 일에 착수하고도 문장이 쉬이 이어지지 않거나 불필요하게 긴 시간을 투자하는 데는 대개 이 변명이 뒤따른다. 이것이 글쓰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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