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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Aug 12. 2020

마작하는 여자들, 조이럭클럽

우리의 마작 클럽 리부트 프로젝트

며칠 전, 짧은 여름 휴가 중에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친구 P에게서 카톡이 왔다.

“’두낫띵클럽(Do nothing club)’이라는 거 들어봤어?”

가벼운 마음으로 검색을 했다. 문구 덕후인 콘텐츠 기획자와 배달의 민족 마케터 출신인 친구 두 명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모토로 만든 클럽. 미국 레트로 카툰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 디자인이 흥해 MD 상품 등으로 수익을 내고 있었다. 내 주변 지인 중에서도 대여섯 명이 이미 이들의 인스타를 팔로하고 있다.

P는 이 두 창립 멤버들이 프로젝트를 공모할 시점의 카톡을 공개한 것에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특별히 치밀하고 거창한 회의록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긴긴 “ㅋㅋㅋㅋㅋㅋ”들로 이루어진 말풍선들이, 우리도 종종 나누는 일상 아이디어들 속 그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단하고 멋져 보이는 이들의 시작도 실은 꽤 친근하다.

“근데, 이 사람들도 마작하나봐.”

뭐? 마작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우리는 늘 이렇게 '마작만큼은 우리가 먼저 했다’고 주장한다. 주변에 마작 클럽이 생겨날 때마다, 또 마작 인구가 늘어난 게 감지될 때마다 매번 이 실없고 무의미한 선점의 깃발을 가져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2년 전, P와 또 다른 친구 K의 합심으로 우리는 마작 클럽을 만들었다. 당시 현직 기자이던 P는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을지로에 마작 바를 차리는 게 꿈이 되었고 나는 일단 마작부터 배워서 우리끼리 먼저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마작의 정형화된 이미지, 이를테면 비 내리는 홍콩 완차이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묘사되는 살롱이라든가 폐쇄적인 부잣집 가족 전통 문화로 향유되어 온 은밀한 게임판 위 오브제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로망이었다. 아직 국내에선 대중적인 게임으로 자리잡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지금 당장 마작을 시작하기 충분한 이유였다. 때마침 P의 중국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대만인 교수님으로부터, 집안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샨둥성 현지 마작 룰을 배우는 행운까지 얻었다. 우리는 각자의 친구들을 한두 명씩 마작판에 초대하기 시작했고, 이 모임을 ‘조이럭클럽(The Joy Luck Club)'이라 이름 붙였다. 조이럭클럽은 1990년 중국계 미국인 작가 에이미 탄의 동명 소설에서 따온 것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함께 모여 마작을 하던 중국계 샌프란시스코 미국인 여성 네 명과 그 딸들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니까, 우리 이제는 모여서 게임만 하고 헤어질 게 아니라 진짜 뭐라도 좀 하자.”

클럽을 만든 지 2년 만에, 우리의 게으른 꼴을 더는 참고 볼 수 없었던 P가 말했다. ‘정기적으로 모여 마작을 하는 2030의 여자들’. 꽤 근사하게 들리기도 하는 이 모임의 명맥을 그 동안 성실히 유지해왔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대견히 여겼던 나와 달리, P와 K는 지금이라도 이 소셜 클럽을 제대로 브랜딩해 다양한 채널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다 누군가가 팟캐스트를 시작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평소에 모여 게임을 할 때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들, 이를테면 일터에서 겪는 부당한 일들부터 SNS를 뜨겁게 달구는 사회적 이슈, 나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들과 문화 콘텐츠에 대한 시각 같은 잡다한 주제들을 만담(漫談)화해보자는 거다. 첫 에피소드로는, 우리의 모태이기도 한 <조이럭클럽>의 원작 소설과 영화를 다루고 그로부터 지금 우리의 현실을 비춰보자는 데까지 얘기가 진행됐다. 나는 가만히 듣다 고민에 빠졌다.

바야흐로 ‘셀프 브랜딩’과 ‘사이드 허슬(Side hustle)’의 시대다. 평소의 내 자아와 다른 '부캐’ 만들기가 유행하고 직장인들은 한번쯤 잘 되면 퇴사까지도 꿈꿔볼 수 있을 과외(課外) 활동을 도모한다. 공상가인 내게도 이 장르는 언제나 몹시 매혹적인데, 그 때마다 반대로 나를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 바로 습관적 자기 검열의 벽이다. 남들 다 하는 유튜브, 팟캐스트, 출간, 이런 것들 막상 시작하자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나?', '내 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나보다 훨씬 더 덕후거나 전문 지식을 가진 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면 어쩌지?’ 류의 걱정들이 앞선다. 모두가 크리에이터고 인플루언서고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는 시절이지만 그에 걸맞지 않은 구시대적 노파심이 나를 망설이게 한다. P와 K의 야심찬 조이럭클럽 팟캐스트 제안을 앞에 두고도, 버려야 할 마작패를 만지작거릴 때처럼 주저하게 됐다.

나름대로의 고심을 끝내게 해준 공신은, 이러다간 정말로 영원히 아무 것도 못 하겠다는 두려움이었다. 뭐든 일을 벌리고 본다는 전형적 ENFP인 친구들의 추진력에 얼떨결에 등 떠밀린 것이라 해도 상관 없다. 일단 뭐라도 시작을 해야 하겠다. P가 말한 두낫띵클럽 외에도 요즘은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출발해 인기를 얻고 안정적인 플랫폼으로 정착해가고 있는 모범 사례들이 차고 넘친다. 현직 여성 기자들이 모여 다양한 경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주는 <듣똑라>, 일하는 밀레니얼 여성들의 커뮤니티 <빌라선샤인>, 페미니스트 디자이너들의 작업 공간 <FDSC> 같은 좋은 모델들은 우리를 벅차게 한다. 여성들은 더 자주 뭉치고 연대해야 한다. 그만 망설이고 많이 발언해야 한다. 이제 다른 이들의 작당 모의를 넋 놓고 부러워하지만 말고 우리가 가진 이 썩 괜찮은 아이템을 잘 살려볼 것이다. 세상 속 갖가지 잡다한 주제와 마작을 엮기도 하고, 마작을 통해 우리가 교류했던 바를 클래스를 열어 공유하기도 하고, 그 동안 안 해서 없었지 하자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다 누가 아는가, 조이럭클럽이 정말로 조이(Joy)를 불러올지 럭(Luck)을 불러오게 될지, 아니면 둘 다일지. 누가 아는가, 어느 날 갑자기 <두낫띵클럽>과 콜라보 마작 콘텐츠를 만들게 될지.

마작은 용의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만들면 이기는 게임이다. 마지막 패를 놓아 훨훨 나는 한 마리 용을 완성시키는 순간처럼, 본격적인 새 프로젝트의 출발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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