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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Jun 14. 2020

서울의 일곱 가지 토템(Totem)

서울에 살다 보면 보이는 것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너의 모든 것(You)>에 나오는 'LA의 일곱 가지 토템'을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서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 저도 서울 토박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 산 지 10년은 넘었죠. 서울에는 일곱 가지 토템(totem)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맘대로 정했습니다.- 여기서 토템이란, 잠시 이 도시를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들은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죠. 최소 서너 해 이상 서울에 산 사람들만이 드물게 한번쯤 마주쳤을 법한 상황이나 사물들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모두 보게 된다면 당신은 비로소 공식적으로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낄 겁니다. 들어보시겠어요?

첫 번째, ‘혹’ 붙은 종량제 봉투를 차에 싣는 환경미화원입니다. 전세계서 서울처럼 모범적으로 분리수거를 시행하는 도시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종량제 봉투값이 비싸죠.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음식점이나 숙박업소, 한 푼이 궁한 원룸이나 고시원 등지에서는 제대로 버리는 일 자체가 부담입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하는 게 바로 ‘혹’이죠. 50리터짜리 봉투 위에 거의 같은 크기의 일반 쓰레기 봉지를 혹처럼 엎어서 테이프로 붙여놓는 겁니다. 그럼 사실 상 100리터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죠. 이걸 수거해가는 환경미화원 분들 보신 적 있나요? 혹이 붙은 비닐은 무거운 건 둘째 치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어 한번 찢어지면 수습이 불가합니다. 손을 다치기도 십상이죠. 특히 이렇게 더운 날, 미화원 분들께 이 ‘혹’은 혹이 아니라 악성 종양일거에요.

두 번째, 북한산 매미 나방의 유충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냐고요? 주황색과 갈색이 섞인 몸에 털이 송송 나 있고 제법 빠른 속도로 기어 다니는 이 애벌레들은 산책길이나 등산로변에 출몰합니다. 나무와 숲을 갉아먹는 이 해충들은 최근 지구온난화로 날씨가 더워진 탓에, 월동(越冬)하는 동안 얼어죽지 않고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실제로 요즘 북한산 등산로 이 곳 저 곳엔 매미 나방 유충들을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국립 공원 측에서도 대단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네요. 그 동안 늦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계절에 이들을 본 적 없으셨대도, 최근 1-2년 사이엔 높은 확률로 목격하게 되실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어깨나 다리에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세 번째, 악질의 택시 기사입니다. 한국에서 택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 대중적인 교통수단입니다. 저도 택시를 몇 년간 하루 한번 이상 꼬박꼬박 타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서울의 택시 기사들을 만납니다. 당연히 정말 친절하고 좋은 분들도 많아요. 그리고 대다수는 별 특징 없이 묵묵히 본인의 일을 수행하거나, 승객에게 다소 귀찮고 무례한 말들을 건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직업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이 미달이어서 신고를 해야겠다 싶기까지 한 이들이 간혹 있어요. 브레이크를 수시로 밟는 행위로 미묘하게 승객을 위협한다거나, 혼자 탄 여자 승객에게 불쾌한 여성혐오 발언들을 쏟아낸다거나 하는 기사죠. 서울에서 택시를 매일 같이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여성이라면 이렇게 이상한 소수의 기사들과 공포의 동승을 하게 될 확률이 기가 막히게 높습니다. 본색은 만만한 약자에게 더 잘 드러나니까요. 물론 이런 경우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기도 꺼려진다는 게 아이러니지만요.


네 번째, 불 꺼진 남산타워입니다.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서울 한 복판의 남산 위에 자리한 N서울타워는 상징적인 랜드마크입니다. 서울을 알리는 책자나 엽서 등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이죠. 이 타워의 불 꺼진 모습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언제나 화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남산타워이기에 이 모습은 꽤 희귀한 광경입니다. 남산타워는 매년 4월 22일 지구의 날을 맞이해 지구촌 전등 끄기 캠페인 ‘어스 아워(Earth hour)’에 동참합니다. 매번 5분에서 10분 정도 아주 잠깐만 소등하기 때문에, 복잡한 서울 살림살이 와중에 운 좋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면 꽤 반가울 거에요. 이 전지구적 찰나의 시간을 철저히 계산에 넣어 로맨틱한 이벤트로 활용해 볼 수도 있겠네요. 물론 그 취지를 생각해 전기나 물자를 너무 낭비하지는 않는 쪽으로요. 


다섯 번째, 다리 하나 없는 길고양이입니다. 서울엔 길고양이가 많습니다. 길고양이 문제는 지역사회의 주요한 갈등 요인들 중 하나죠. 동물보호단체나 일부 캣맘, 캣대디들의 외로운 싸움이었던 적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도 동물권과 공존에 대한 논의가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고 있죠. 하지만 여전히 길고양이와 유기묘들은 위험천만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추위나 불의의 사고, 사람의 악행으로 신체 부위를 잃게 되는 고양이들은 정말 많은데 우리 눈에 쉬이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그들이 얼마 못 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부터가 3년이 채 안 됩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들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죠. 당신이 지나가다 다리 없는 고양이를 만난다면 앞으로 길 위에서의 그의 삶에 한번씩 좋은 일들도 있기를, 세상을 떠나는 날엔 부디 고통이 길지 않기를 빌어주세요.


여섯 번째, 휴지나 스티커로 막아 놓은 화장실 몰카 구멍입니다. 단, 당신이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일 때 월등히 많이 볼 겁니다. 지하철이나 공원, 술집처럼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중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전하다고 믿는 회사나 학교 화장실도 절대 안심할 수 없죠. 실제로 한국에서 몰카 범죄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국가와 경찰이 이를 막는 일에 나서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랍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서울 시내 어딜 가도 습관적으로 불안에 떨어왔어요. 나사 구멍 형태의 렌즈가 기승을 부리니 화장실 문과 벽의 구멍이란 구멍은 휴지를 말아 닥치는 대로 막고, 매니큐어를 소지하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죠. 물론 몰카 공포의 실체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도 어딘가에 제 화장실 몰카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이미 너무 익숙한 몰카 구멍 대신 그걸 발견하는 날, 진정한 서울러로서 새로 거듭났다는 생각이 드려나요.


일곱 번째, 식당에 달아 놓고 밥을 먹으러 오는 아이돌 연습생입니다. 이 작은 땅덩어리를 놓고 보면 K-pop이란 정말 큰 산업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이돌 연습생들은 대개 대형 엔터테인먼트들이 자리한 청담동 일대에서만 보였지만, 중소기획사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이제는 서울 지역 곳곳에서 이들을 마주칠 수 있습니다. 특히 회사 사무실 앞에 자리한 식당들엔 월 단위로 식대를 지불해놓고 끼니를 해결하러 오는 소속 연습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이들을 어떻게 알아 보냐고요? 우선 일반인과 달리 얼굴과 몸에 붓기라곤 찾아볼 수 없고 매트한 톤의 컬러 렌즈를 끼고 있으며, 하나 같이 총천연색 탈색 머리를 하고 있다면 십중팔구는 맞을 겁니다. 시끌벅적 몰려 다니며 애써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혹시 눈빛에는 미세하게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 스친다면 그 직감은 더더욱 적중할 거에요. K-pop을 이끌어나가는 동량이 될 그들이, 밥 먹는 시간만큼은 편안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려 드리는 서울의 일곱 가지 토템입니다. 이 도시에 살다 보면 분명히 이것들을 하나씩 차차 발견하며 제 말에 공감하게 되실 거에요. 자, 훗날 당신의 기준으로 꼽은 서울의 일곱 가지 토템도 제게 들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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