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를 May 12. 2020

더비이스트로, 사라진 식당을 추억하며

서른이 되던 해의 유난스러웠던 생일파티

며칠 전 점심시간에 한남동 디뮤지엄 안에 있는 ‘매덕스 피자’를 찾아갔다. 평소라면 사무실에서부터 택시를 탔을 거리지만 유난히 볕이 좋아 동행과 약속한 듯이 걸음을 옮겼다. 한남 오거리를 지나 30분 정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 반복되는 여정을 마치고 나니 숨이 찼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매덕스 문에 영업 종료 안내문이 떡 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가. 어쩐지 갈 때마다 늘 손님이 우리 밖에 없더라니! 멀리 떠나온 관계로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옆집에서 대충 타코로 허기를 채우는데 서운함이 가시질 않았다. 식당이 없어진다는 것은 음식의 맛과 함께 딸려오는 오감(五感)과 기억과 공기가 없어지는 일이라는 게 새삼스레 상기됐다. 매덕스에 각별한 추억이 있지도 않았는데 이렇다니 혜화칼국수나 평양면옥이나 오백집이 없어진다는 상상은 벌써부터 슬프다.


사라진 식당에 대한 생각을 하니 떠오르는 곳이 있다. 2018년에 문을 닫은 홍대 놀이터 앞 ‘더비이스트로 서울(The Beastro Seoul)‘이다. 이 식당은 내가 2년 전 서른 살 생일 파티를 했던 곳이다. 기름기 넘치게 요리한 아메리칸 비스트로를 표방하며 소의 횡경막 부위로 만든 행어 스테이크가 시그니쳐인 곳인데, 나는 홍대 뿐 아니라 서울 시내의 유사 장르 레스토랑 중 이 곳을 능가하는 곳을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다. 음식의 맛과 메뉴 구성, 공간 디자인과 홀 운영,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서른을 맞이하며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 하룻밤 술과 음식을 대접할 곳으로 이 곳을 택하기까지는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자의식 과잉에 딱 어울리는 베뉴 선정이었다.


더비이스트로를 운영하는 이들은 젊은 남매였다.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편한 코리안 아메리칸들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언제나 이 곳에는 서버와 손님 모두 외국인 비율이 더 높았다. 이 주인 남매는 평소에도 실제 조리나 외식 경영에 대한 조예와 철학이 얕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파티라는 프라이빗 이벤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한층 더 감명 깊었다. 우리는 테라스가 딸린 3층 실내 루프탑을 통째로 빌려 썼는데, 특히 남매 중 매니지먼트를 맡은 실장님 누이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여느 웨딩을 방불케 했다. 함께 준비하는 친구들과 내가 몇 주 전 방문해 식사를 맛볼 수 있도록 했고 자리 구성을 짜기 위한 테이블 배치도를 미리 공유해줬으며, 그 날의 예산에 완벽히 맞는 메뉴와 와인 리스트를 구성해주었다. 수퍼푸드 시저 샐러드, 프렌치 어니언 스프 파이, 서던 후라이드 치킨, 행어 스테이크와 트러플 감자튀김 따위의 일전에 먹어 보지 못한 음식들부터 블루베리 턴오버, 위스키 푸딩 같은 디저트까지, 근사한 4인 테이블 기준 쉐어링 코스 메뉴가 준비됐다. 축하연에 걸맞게 적당히 괜찮은 급의 샴페인으로 시작해 누군가 술을 더 원할 경우를 대비해 저가 레드와인들을 대령키로 했다. ‘이 맛에 돈 벌지’와 같은 허영이 히로뽕처럼 온 몸으로 흘러 퍼지는 순간이었다.

초대된 서른여 명의 친구들은 내 상상보다도 훨씬 더 재밌어 보였다. 나는 예의 그 샴페인 잔을 쨍그랑대며 좌중의 주목을 산 다음, 각각의 친구들을 소개하는 호스트 스피치까지 욕심껏 다 했다. 한번도 만난 적 없이 줄곧 서로 얘기만 전해 들었던 초중고·대학 동창들과 회사 지인들, 덕후 친구들 등이 한 데 어울리는 모습은 전에 없던 볼거리였다. 이 유난스런 생일 파티의 원래 목적은 그야말로 인생의 중요한 기점에서 나를 둘러싼 이들이 같이 웃고 떠드는 자리를 만들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예기치 않게 더 큰 의미들이 부여됐다. 레즈비언이고 게이고 스트레이트고 할 것 없이 서로 호감을 느낀 이들의 ‘사랑의 작대기’가 무작위로 오고 갔으며, 100점짜리 드레스코드 감각뿐 아니라 사진이나 기타 연주 같은 친구들의 숨겨진 재능들을 발견했다. 또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도모해볼 수라도 있게 해준 스스로의 경제력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비록 그 이후 한 동안의 일시적 파산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 때 그거 ‘비혼 파티’ 아니었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다. 그 날에 얽힌 기억은 사람마다 다양하고 여태껏 캐고 캐도 또 할 말이 많다. 무엇보다 그 공간을 장식해 준 ‘더비이스트로’에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은데, 그 날 거하게 쓴 덕에 적립금을 무척 많이 받아, 한 때 관심 있던 남자가 외식업을 준비하고 있다기에 거기 가서 내 적립금 쓰며 음식 맛보시라고 허세를 부려본 적도 있다.


더비이스트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인스타그램과 홈페이지엔 식당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 동안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메시지가 유쾌한 폰트로 쿨하게 적혀 있었다. 그들답다고 생각했다. 가끔 오누이의 그 서툰 한국어가, 요리할 때 남자의 피어싱이나 타투가, 인이어를 낀 채 3층과 바를 오가며 실시간 매의 눈으로 테이블을 살피던 그 날 밤 여자의 발걸음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파티에 왔던 이들이 입을 모아 이 식당엔 꼭 다시 와야겠다 했었는데 그럴 새도 없이 식당은 문을 닫았다. 묘하다고 생각한다. 파티 때문은 아니지만 서른을 기점으로 삶에 대한 태도가 꽤 많이 바뀌었는데, 장소가 사라지는 바람에 그 이전의 삶이 피날레로 장식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무섭게 나는 더비이스트로와 작별하고 말았다. 그 곳의 종말과 함께 다시 태어난 서른은 모든 게 미지수다. 혹자의 말처럼 비혼 선언이 될지 비건 선언이 될지, 아니면 비만 선언이 될지.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다.

이전 09화 앞서 간 여성들의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