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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25. 2020

진짜 상실

잃어버린 너에게

 너는 06학번이다. 새내기 시절 처음 본 너는 3학년인 법대 학생회장이었다.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달변이고, 눈망울이 유독 큰 탓에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남학생으로서 새내기 성(性)인지 교육 세션을 맡은 너의 입에는, 동안과 어울리지 않는 묘한 권위가 부여됐다. 늘 멀리서만 보던 너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4학년 1학기를 준비하던 때다. 지루한 법학 전공에 파묻혀 있다 1년 간 캐나다 교환대학에서 인류학, 여성학, 사회언어학 따위의 수업을 듣고 허파에 바람을 잔뜩 채운 채 돌아온 나는, 대학의 마지막 두 학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신촌 어느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너는 큰 눈을 번득이며 학생회장 출마에 소위 뽐뿌를 집어넣는다. 로스쿨 도입으로 활기를 잃은 학생 사회에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에 맞는 해결책을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여성주의를 기조로 하는 단과대학 학생회 출마를 준비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너의 도움을 구했다. 그렇게 너는 전 학생회장이자, 현 학생회장의 오른팔이 되었다. 우리는 사후피임약 처방 필수 법안에 규탄하는 단과대학 연서 자보를 함께 썼고, 여성주의와는 좀처럼 거리가 먼 총여학생회의 행보에 반대하는 논리를 만들었으며, 조한혜정 교수의 수업을 함께 이야기했다. 너는, 언제나 학생회는 동사무소 같은 기구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해 우산과 법전 따위를 대여해주며 충분한 보람을 느끼던 우리의 부회장과 자주 부딪혔다. 너는 여성주의를 누구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성주의가 이야기하는 방식을 좀 더 친절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주장에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전술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급진적이었고 타협이 없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으면 정치를 했겠지만 생각이 틀린 사람과 공존할 자신이 없으니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나는 너의 동지로 불리는 것이 종종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너는 밤늦게 술에 취한 채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로 들어와 소파 위에 곯아떨어진다. 당시 학생회 집행부원이었던 C는 1교시 직전 책을 꺼내기 위해 학생회실에 들르고, 너는 누운 채로 사물함을 열던 C를 끌어당겨 포옹을 시도한다.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그 방에서 벌어진 일을 다음날 C가 내게 고백하고, 나는 하루 정도의 고민 끝에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우선 사실 관계부터 명확히 파악해야 했던 나는, 그리고 무엇보다 너의 동지였던 나는, 네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너는 그 날 아침의 일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고 C의 진술에 틀린 점이 없다는 점을 내게 확인해주면서도, 학내 성추행 사건 중재의 책임이 있는 자가 이렇게 가해자에게 비공식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것은 부적절했다며 도리어 나를 책망한다. 이 사안의 처리를 두고 집행부 내부의 비상 회의가 꾸려졌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너는 C와 우리를 향한 사과를 남기고 떠난다. 사건을 다루는 학생회장의 대응 방식이 아쉽다는 말과 함께. 그 이후 광복관에서 너를 마주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간혹 있다고 해도 모자를 눌러쓴 채 너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너와 나는 졸업을 했다.


 재작년 여름, 안희정 공판의 1심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 현장에서 나는 너를 우연히 마주쳤다. 5년여만이었고 너는 로스쿨 재학중이었을 것이다. 네가 나를 먼저 보고 눈길을 피했지만, 바리케이드가 쳐진 역사박물관 앞 좁은 길목 인파 속에 몸을 숨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학생회 시절의 활동명이 아닌, 내가 너를 부를 때 거의 한 번도 입에 담아 보지 않았던 너의 실명으로 상민 씨, 하고 불렀다.


 너를 잃은 것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상실감조차 상실된 상실이야말로 진짜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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