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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앞서 간 여성들의 이야기

2019년 4월 어느 날의 일기

최근 북한남동 주택가를 지나다 어느 카페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공간이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울프소셜클럽>임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탈혼과 유사 경력단절을 겪고 마흔 이후 여성으로서의 삶을 고민하게 된 김진아 대표가 문을 연 페미니즘 공간이 바로 이 곳이다. 그는 최근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해, 서촌이며 한남동 일대에서 활발히 북토크도 열고 있다. 주말에 있을 이 북토크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찰나의 상념에 잠긴다.



앞서 간 여성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영감을 얻는다. 전문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빛난다. 범죄학 분야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이수정 교수님의 감정 노동과 꾸밈 노동이 배제된 인터뷰가 그렇고, 늘 남자 동료들에 비해 일감이 부족했지만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며 시름을 떨치는 <밥블레스유> 개그우먼들의 웃음이 그렇다. 나보다 먼저 삶을 시작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영향을 줬는데, 인생의 매 구간마다 각기 조금씩 다르게 유의미했다.



유년 시절, 최초의 여성법조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전기를 읽고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특별히 내색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학용품마다 딸의 이름을 손수 써주며 그 앞에 반드시 ‘세상의 주역이 될’이라는 말을 덧붙였던 사람이었고, 그 때까지 나는 세상에 성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알파걸이었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이태영 여사와 같은 소수자성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이 헛똑똑이는 오히려 같은 인권변호사라면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20대에는 한 명의 우상을 두지 않았다. 일상을 조여오는 불법촬영, 일간베스트, 성차별적인 콘텐츠와 여성혐오적 언어, 약자를 향한 모든 형태의 편견과 조롱에 분노하기 시작하던 시절의 나는, 뛰어난 개인을 부각시키고 찬양하는 일은 평범한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개념녀와 된장녀를 분리하는 프레임 안에서는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 때 야망과 승부욕으로 가득 차있던 ‘세상의 주역’은, 그러면서도 스스로 김치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강박적인 자기검열을 하며 자괴감을 채워갔다.



일하는 사람이 된 뒤에는 역시 일터에서 앞서 간 여성들의 이야기에 반응하게 되었다. 똑같이 공채로 입사했어도 남자 신입사원은 3급, 여자는 4급에 해당하는 호봉을 받던 최인아 제일기획 전 부사장 세대에 비하면 시절은 아주 많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팀 회식 후 여자 팀원만 일찍 귀가 조치시키고 유사 성매매 업소로 3차를 떠나 다음 날 팀장 포함 다 함께 늦게 출근하는 풍경은 옛날 얘기가 아니라 오늘날 내 친구가 다니는 타 대기업의 실상이다. 여사원들이 무의식중에 담배, 산책, 축구, 등산, 2차, 출장 등의 남성연대 공간에서 배제되는 환경은, 의도가 분명한 ‘펜스 룰(Pence Rule)’만큼이나 여성의 기회를 야금야금 앗아간다. 신입사원 성비와 임원 성비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현상적으로 분석하다 보면, 구조와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결혼과 육아는 나의 성취를 저해하는 요인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고민에 마음이 아득해질 때, 10년간 맥킨지 등에서 투자 분야 전문가로 일하다 퇴사 후 콘텐츠 협동조합을 설립한 제현주 대표의 책 <일하는 마음>이 의심과 불안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온전히 ‘나’의 성장에 집중하는 법을 알려준다.



돌아오는 주말에 만나게 될 한남동 <울프소셜클럽>의 김진아 대표는 ‘우먼 임파워링’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여성들이 연대하며 서로를 옹호하고 북돋는 힘. 나는 내가 좌절하고 분노했던 순간들에 앞서 간 사람들을 기억한다.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의 엄마도, 언니도, 선배들도 뒤따라가는 내게 영감을 준 진정한 권위자들이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의 첫 여자 경제학 교수였던 마이라 스트로버의 자서전 제목처럼, ‘뒤에 올 여성들에게’ 나도 그런 인간으로 남기 위해 고집스럽게 노력할 것이다.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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