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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Jan 28. 2023

봉준호의 <기생충>을 위한 두 가지 단어

영어, 맥주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1919년. 3.1 운동이 있던 그 해. 그해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박승필이 제작하고 김도산이 연출한 한국영화사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되었다. 그리고, 100년이 흘러 2019년 5월 26일. 프랑스의 아름다운 휴양지 칸에서 열린 일흔 두 번째 영화제에서 봉준호의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사 100년에 내린 벼락같은 축복’. 이미 <기생충>은 개봉하기 전부터 한국영화사 100년 동안 그 어떤 영화도 오르지 못했을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이제는 이 영화에 대해서.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을 만큼 분위기는 진정되었다. 영화가 전반전 한 시간 동안 감춰두었던, 지하실 남자 ‘근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박명훈은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비밀유지 계약이 끝”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에피소드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기생충>은 끊임없이 거시적인. 그러니까 ‘한국영화사적 의미’와 ‘사회현상학적 분석’의 텍스트로 인용되었고 평가되었다. 물론, 이 즉각적인 반응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애초에 봉준호의 영화는 보고나서 ‘사회현상학적 분석’을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 영화들이었다.      


 한 줄로 요약가능한 사건들. 이를테면 무료한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진 강아지의 실종 (<플란다스의 개>), 경기도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살인의 추억>), 한강에 출몰한 괴물(<괴물>), 살인자의 누명을 쓴 아들(<마더>). 봉준호는 장르적 구조물을 설치해 관객을 즉각적으로 유인한 뒤, 그 안에서 끊임없이 미로를 만들어 다층적인 겹을 쌓는다. 어떻게 해도 살인범을 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착하고야 마는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과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더 진행되는. 어떻게 해도 딸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착하고야 마는 <괴물>. 침묵과 야합, 폭력과 부정으로 인해 은폐되는 범행들(<플란다스의 개>, <마더>)에 이르기까지. 봉준호의 영화는 당면한 동시대적 두려움이 투영된 거울로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기생충>의 절묘한 지점은, 봉준호의 영화를 ‘사회현상학적 분석의 틀거리’로 쓰고 싶은 사람이나, ‘동시대적 두려움이 투영된 거울’로 놓고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나 결정적으로 그냥 ‘봉준호의 영화 자체’를 즐기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는 데 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면. 봉준호는 영화광이고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의 측면을 언제나 중시한 감독이다. 동시에 치밀한 수준으로 구축된 이야기의 밀도가, 얼마나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오랜만의 입증사례이기도 하다. 봉준호는 짐짓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짐짓 딴 이야기에 눙쳐놓지도, 외형적으로 전작과 다른 게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방어하려는 잔재주를 피우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서 오히려 전작들과 겹치는 주제들을 제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작들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봉준호식 중간결산. <기생충>은 지금껏 잘 해왔던 것을 더욱 잘 해냈기에 오래도록 회자될 작품이다. 그야말로. 데뷔 20년을 맞은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참으로 시의적절 하다’.       


 봉준호가 구축한 <기생충>이란 행복한 미로는 끝없이 헤매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길잡이, 어떤 단서를 들고 미로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장면들은 다른 의미가 되어 활동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거시적이고 사회학적인 시선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 그러나 반복되는 어떤 것을 통해 더듬어본 <기생충>이라는 미로 속 벽의 촉감들.     


고추장 Is Red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송강호)의 가족들은 얼마 전 대왕 카스테라 대리점을 실패한 뒤 반지하방에 산다. 기택의 가족들이 공고하며 면밀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바닥층을 다지는 사람들이라는 건 애석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봉준호는 이 절망적인 기운을 오프닝에 압축해서 보여준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지난 2010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는 <두 개의 결정적 순간: 영화로의 입구와 출구>라는 제목의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한 바 있다. 봉준호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의 몸체. 즉 오프닝 다음 순간부터 엔딩 직전까지로 관객들을 태우기 위해 온 셔틀버스가 아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결성을 가진 이미지에 가깝다.      


 <기생충>의 오프닝은 방에 앉아있는 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집 안의 풍경과 창문 밖 풍경이 겹쳐보인다. 시선의 주인의 눈높이와 수직을 이루는 곳은 집 바깥의 한 점이 아니라 집 안 창문의 프레임 속 한 점에 위치한다. 즉 그들은 반지하에 살고 있고, 평평한 지평면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피라미드속 계급도에서 바닥 면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본편이 시작되자 마자 우리가 보는 건 윗집의 와이파이를 끌어다 쓰기 위해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 남매의 모습이다. 말 그대로. ‘기생’.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상. 허가 받지 아니한 상태로, 타인이 가지고 있으나 슬쩍 흘러넘치는 잉여한 자원을 집어먹기 위한 처절함. <기생충>은 시작 5분만에 기택 가족의 신분, 습성, 위치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기택 가족의 비교항들을 서서히 제시하면서 겹을 쌓아나간다.      


 아들 기우가 친구 민혁(박서준)의 소개로 박 사장(이선균)네 딸인 다혜(정지소)의 과외교사로 들어가고 기택의 다른 가족들 모두 박 사장네 집의 고용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기택/박 사장 이라는 두 극단적인 비교항의 이야기로 인상에 남지만, <기생충>은 도약의 영화가 아니라 점진의 영화다.(이 ‘점진’의 테마는 후에 다시 한번 설명할 것이다) 즉, 영화 속의 기택 가족은 몇 가지의 비교항을 거친 다음에 박 사장의 집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 비교항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반복적인 설정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기택 가족이 행하는 유일하게 합법적이고 당당한 노동(사문서 위조, 셋업 범죄 등 탈법적인 과정 없는 노동)은 집 앞 피자가게에서 의뢰한 피자박스 접기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피자 박스 4개 중 1개는 불량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된다. 영화는 친절하게  ‘불량’이라는 단어와 동시에 등장인물들이 시선이 기택에게로 쏠리는 반응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기택이 영화 마지막에 벌이는 살인에 대한 암시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후의 이야기이고. 재밌는 것은 그 다음이다.     


 피자가게 사장은 피자박스가 잘못 접힌 부분은 급료에서 차감하고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따지는 기택의 아내 충숙(장혜진)에게 ‘이런 것 하나 하나가 우리 브랜드에 데미지를 준다’고 이야기한다. 충숙과 사장의 대화가 타협점을 찾지 못할 것 같은 각이 날카롭게 뜨자, 기우와 기정은 사장에게 ‘알바생이 도망가서 힘드시지 않느냐’며 새로 알바생을 뽑으라고 종용한다. 이때 사장이 기우에게 하는 말은 ‘그런 디테일은 어떻게 알고 있지?’다. 피자 가게 사장이 하는 대사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기우와 기정, 기택과 충숙의 대사와 다른 점이 하나 포착된다. 끊임없이,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영어’는 <기생충>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기우가 다정에게 과외를 통해 가르치는 과목? 영어다. 다정의 어머니 연교(조여정)는 전임 과외강사인 민혁과의 관계가 아주 마음에 들었고, 따라서 기우가 민혁 만큼의 만족도를 주지못하면 굳이 과외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참관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때, 동의를 가장한 강요를 하면서 연교가 하는 대사는 “Is It Okay With You?”다. 영화에서 연교가 쓰는 단어들은 피자가게 사장이 보여주는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고추장 is red”, “I’m Deadly Serious”, “믿음의 Belt”. 기정이 기우의 셋업으로 인해 일리노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제시카로 행세할 때, 연교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순간은 다송의 그림에서 “Schizophrenia(조현병)”존을 언급할 때다. 이 영화에서 가장 욕설이 많은 대사를 부여받은 캐릭터는 물론 기정이다. 박 사장은 실제의 배우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사진과 상패에 적힌 이름으로 등장하고, 거기에는 영어로 “Nathan Park”이라고 써있다. 그의 원래 이름 박동익이 드러나는 건 한참 후, 지하실에 기생하는 근세가 박 사장님을 찬양하며 이마로 센서등을 조작하는 장면까지 오고 난 다음이다. 그리고 마지막, 박 사장의 아들 다송은 ‘인디언 오타쿠’다. 정말 말 그대로. ‘아메리카’. 영화속에서 정확히 어떤 곳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지만, 민혁이 기우에게 다송을 연결시켜주는 이유 역시 민혁이 ‘해외’로 ‘교환학생’을 가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영어’로 인물들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걸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영어권 국가는 아닐까?    

 

 따지고 보면, 피자가게의 사장과 기택의 가족이 그렇게 까지 유의미한 계급적 차이를 지닌 비교항인지는 조금 의문이다. 물론 지금 당장의 경제사정으로 보자면 그러할 수 도 있겠지만, 기택 역시 한때는 (망했지만) 대만 카스테라 대리점의 점주였다. 기택 가족의 과거가 부르주아지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어도, 어쨌든 ‘자영업자’로서의 위치에는 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반지하방에 모여있고, 피자박스 접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순간. 즉 피자가게 사장과 기택 가족이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들의 언어에는 차이가 발생한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는 이 계급적 ‘차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객실이라는 장치를 썼다. 꼬리칸 사람들과 앞칸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의 차이. 이 차이가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차이를 실감할 수 있지만, 이미 알고있는 계급간의 차이 이상의 상상을 발휘할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기생충>에 와서, 물론 기택의 집과 박 사장의 집은 심대한 이미지적 차이를 내재하지만 단순히 이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들리도록 하는 것’의 단계로 다변화 시키는 솜씨를 발휘한다.      


 ‘영어’ 그 자체에는 그저 영미권 국가들이 쓰는 언어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한국사회에서의 영어는 지식인과 비지식인/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로 오랫동안 작동해 왔다. 영어에 능숙한 채로 얼마나 더 탈-한국적인 생활방식(이걸 부를때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불러야 아마도 맛이 살아날 것이다)을 영위하느냐가 신분을 가르는 잣대로 작용해 왔다. 대학살이 벌어지는 다송의 생일파티 장면은 바로 그런 상류층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송의 생일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기우는 그 자신도 상류층의 일부인 다혜에게 기우 자신이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느냐’를 물어본다. ‘어울린다’라는 말에 담긴 함의는 생각보다 넓고 깊다. 단순히 무엇인가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몸에 배어있는지의 여부를 이야기할 때 쓰이는 단어가 ‘어울림’이다. 기우의 몸에 배어 새겨진 것은 상류층의 기품있고 우아하며 ‘구김없는’ 태도가 아니라, 반지하의 냄새다. 그리고 자신이 다혜의 집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아는 결정적인 목격자 문광과 근세는 지금 지하실에 감금되어있다.      


 기우가 다혜에게 상류층과 하류층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인 ‘영어’를 가르친다해도, 어떻게 해도 기우는 다혜와 ‘어울려지지’ 못한다. 기우가 다혜와 그들의 가족이 영위하는 삶의 방식에 ‘어울려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을 알고 있는 문광 부부와 단절되어야 한다. 그래야 ‘재물’로 둘러 쌓인 삶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때 기우가 들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담긴. ‘수석’ 아니었는가. 그 수석으로 오히려 근세에게 기우가 공격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애초에 ‘어울려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선연한 선언처럼 보일 지경이다. 근세가 이미 공격당해 쓰러진 기우의 머리에 한번 더 수석을 내리치는 순간.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봉준호는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은 희망의 순간을 여전히 굳건하게 붙들고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을 엔딩으로 지정하거나(<괴물>, <설국열차>), 아니면 완전히 파열된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순간을 엔딩으로 지정해왔다(<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마더>) 그리고 <기생충>의 엔딩은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전의 비극적 엔딩들 보다 더욱 막막한 현실인식을 드러낸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해피엔딩이라는 목적지로 영화를 운전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필라이트와 삿포로와 위스키 사이의 간극     


 <기생충>이 개봉된 이후, 영화 속에 등장한 ‘음식’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특히 극 중에서 그들이 마시는 ‘맥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영화 도입 부분, 기우의 친구 민혁이 찾아올 때 기택의 가족들은 ‘필라이트’ 맥주에 과자를 먹고 있다. 영화 속에서 기택의 가족들은 ‘한 건’을 해내면 모여서 식사를 하는 패턴을 가진다. 피자박스 접기를 완료한 다음에는 필라이트 맥주에 과자, 기우와 기정이 취직한 다음에는 기사식당, 부모도 취직한 다음에는 삿포로 맥주에 소고기를 구워먹는다. 그리고 박 사장의 가족들이 캠핑을 떠난 다음 빈 집에 모여서는 박 사장의 집에 있는 고급 주류들. 위스키와 코냑을 마신다. 영화 속에서 기택의 가족들이 먹는 음식은 점진적으로 생활수준이 상승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필라이트에서 시작해 삿포로 맥주에서 코냑으로 진입하는 일련의 과정은 말 그대로 그들의 욕망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승하는 것을 보여주는 직관적인 이미지로 기능한다.     


 봉준호 감독은 식사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것을 준수하는 것이 함께 일하는 스태프에게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미각’에 예민한 사람으로 익히 알려져있다. 자, 그럼 이제 조금 가볍게 접근해보자. 영화속에서 그들이 마시는 주류에 대한 분석을 담은 기사들을 보면, 반복적으로 그들이 도입부에 마시는 맥주 ‘필라이트’를 ‘발포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필라이트는 현재 맥주 중에서 평균 소매가격이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주류다. 이 ‘발포주’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기사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발포주’의 정의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필라이트를 마시는 장면을 보면 조금 더 서글픔이 배가된다.     


 발포주는 한국식 주류 구분체계, 주세법에 없는 단어다. 이 단어는 원래 일본에서 건너온 단어다. 일본 맥주의 구분법을 보면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 홉, 물을 원료로 발표한 맥주와, 기타 부재료를 맥아 중량의 50퍼센트 이하로 가미한 맥주만이 ‘맥주’라는 명칭으로 불릴 수 있다. 여기서 맥아 함량을 더 낮추고 부재료 함량이 더 높아지면 이것은 맥주가 아니라 ‘발포주’라고 불린다. 맥아 함량이 낮아지면 맥주 자체의 맛이 감소하는 대신 제작비용이 저렴해지고 세금도 낮아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포주는 ‘맥주 맛과 비슷한 어떤 음료수’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된다. 그리고 필라이트는 일본식 발포주의 개념을 가져와 한국식으로 변형해 만든 최초의 히트 상품이다.      


 즉, 필라이트는 ‘맥주 맛이 나고’, ‘맥주처럼 보이고’, ‘맥주의 향이 느껴지긴 하지만’ 맥주가 아니라 ‘기타주류’다. 그럼 다시 기택의 가족들이 필라이트를 마시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마시는 건, ‘맥주’라는 서민의 술. 편의점에서 만원이면 가족 들 모두가 수입맥주를 한 캔씩 마실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충족하지 못하는 삶을 의미한다. 2019년 현재 동시간대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정상적인 경제인구의 삶을 ‘흉내’낼지언정 그 최소한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기택 가족의 모습을 슬쩍 알려준다.      


 그렇다면 기택 가정의 삶이 조금씩 나아질 때, 소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삿포로’를 마시는 장면은 필라이트를 마시는 장면과 완전히 대비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의미가 된다. 삿포로는 주세법상 ‘맥주’에 속하는. ‘유사주류’가 아니라 ‘진짜 맥주’다. 그들의 삶이 조금씩 정상 가족의 형태로 진입하고 있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 된다. 하지만, 이 장면에도 화면 어딘가에는 불안한 기운이 서려있다. 엄마인 ‘충숙’은 여전히 혼자 필라이트를 마시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생충>은 도약의 영화가 아니라 점진의 영화다. 초반부에 암시하는 메시지들은 후반부에 가서 저 직접적으로. 더 파괴적인 이미지로 되돌아오는 형식. 기택의 가족들이 ‘필라이트’를 마심으로서 그들의 지금 상태가 정상적인 경제인구들의 삶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도적인 순간일 폭우가 내리는 밤 장면은 그들이 삶이 영화가 시작하던 시점보다 더 아래로 처박힐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반지하집이 어쨌든 ‘집’으로서의 역할을 가까스로 해내고 있을 때 그들의 걱정은 집에 배어있는 반지하 냄새와 집 앞에 노상방뇨하는 취객이었다. 그리고 폭우가 내려 집이 침수된 순간 집의 정화조는 역류해 변기 아래로 내려가야 할 물이 위로 치솟아 오른다. 되짚어보면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어느 한 정점에 오른 것처럼 보였던 순간 조차도. 박 사장의 집 거실에 기택의 가족들이 모여 ‘사돈 될 사람 양말빨고 있는거냐’ 운운하고 있던 순간 조차도 기정은 개사료를 먹고 있다.  

    

 시종일관 반복되는 봉준호적 ‘삑사리’이자 이들의 꿈이 허망하다는 걸 킥킥 거리며 보여주는 방식들. 결국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기택의 가족들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상승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역류하는 정화조 뿐이다. 그 순간, 가까스로 ‘흉내’내고 있던 정상적인 삶 조차도 기택의 가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등을 대고 누운 곳은 집을 흉내내고 있던 반지하 조차 아니라, ‘수재민 임시 보호소’다. 이 수재민 보호소는, 봉준호의 전작 <괴물>에서 피난민들이 임시 수용되어 있던 바로 그 체육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결국 기택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계획’이라는. 궤변처럼 들리지만 지금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위안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그들에겐 도망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기생충>은 201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하나의 관점인 ‘노오력’을 생각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노력’의 멸칭. 즉 애초에 잘못 구축된 세계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인간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시스템에 기름칠을 할 때, 기꺼이 톱니바퀴가 되어 자신의 몸이 마모되길 간청하는 젊은 세대에게 은혜를 베풀 듯 하사하는 단어 ‘노력’. 시스템의 잘못을 개인의 잘못으로 치환시키는 단어. 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그 마법의 단어가 사실은 자신의 노력을 오히려 능멸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노력 이라는 단어가 가진 신화적 아우라에 침을 뱉었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모두 ‘노력’을 하고 있다. 기택은 대리운전, 발렛파킹, 대만 카스테라 대리점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보려 했고 아내 충숙은 해머던지기 메달리스트다. 기택은 어쨌든 자신의 능력으로 다혜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정은 인터넷에서 주워들었건 어쨌건 간에 다송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허망해진다. 이미 잘못된 시스템 안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투입해도, 결과값에는 오류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해서 그들이 노력을 중단하기로 한(무계획) 선택을 하는 순간 시스템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삶의 의욕을 이미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무기력하고 피곤한 얼굴의 기택은 여전히 인디언 가발을 쓰고 고용주 아들의 생일 잔치를 위한 광대가 되어야 한다. 진짜 인디언일 수 없는, 망치를 들고 달려나가는 유사 인디언 기택과 필라이트부터 시작해 어떻게 해도 정상 인간이 될 수 없는 기택 가족을 둘러싼 요소들이 결합했을 때, 이 생일파티 대학살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예술과젠더연구소의 학회지 <NW 4.5>를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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