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당신이 우리 집 대장이 되어주면 좋겠다

이제는 당신이 우리 집 대장이 되어주면 좋겠다

by 최정환

대장 왔냐.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밖에서 지인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우리 집 대장을 자랑삼으셨다. 그 시절 이름 대신 불러주신 대장은 왜 그리 창피했던지 한없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난밤.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다시 군 시절 쫄병으로 돌아간 악몽을 꿨다.

그때는 나만 그랬을까. 삶에 목표는 오롯이 제대뿐. 국방부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던 선임들의 위로를 마음에 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야만 했다.

어김없이 찾아왔던 쫄병의 하루.

5시 45분 기상을 알리는 우렁찬 나팔소리가 귓속 달팽이관을 흔들어댔다.

어젯밤 내무반 매트리스에 기대어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건만. 긴 한숨을 토해냈다.


쫄병의 하루는 고단했다.

새벽 공기를 흡입하며 연병장 주변을 사정없이 쓸어대던 쫄병의 억압받는 현실에 분풀이였을까. 싸리 빗자루가 지나간 바닥 여기저기에는 날카롭게 할퀸 자국들로 가득 채워졌다.

반찬보다 몇 배는 많았던 식판 위 수북한 쌀밥을 허겁지겁 입안에 욱여넣으면 위장에서 소화될 틈도 없이 훈련을 가야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뺑뺑이에 선임보다 늦을세라 죽기 살기로 뛰다 보면 어둑어둑 저녁이 찾아온다.

내무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선임들 양말과 옷가지를 모아 세탁기에 투척하고, 잽싸게 군화 손질과 내무반 옷걸이를 어루만지며 각을 세웠다. 젖은 걸레와 한 몸이 되어 바닥을 훔치고, 가냘픈 빗자루에 몸을 기대어 먼지를 툴툴 털어낸다.


잠자리에 들어설 때쯤 이면 쫄병은 만능 엔터테이너로 변신한다. 아무 생각 없는 아메바에서 선임의 마음을 달래주는 코미디언이 되어 웃음꽃을 피운다. 선임의 헛웃음이라도 있는 날이면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분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때로는 춤과 노래를 한데 버무려 어디선가 담아두었던 멋진 대사로 심금을 울리는 뮤지컬 배우가 됐다.


긴 밤을 지새우고 무겁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휴.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시원한 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집안을 둘러봤다. 작은방 서랍 속에는 차곡차곡 정리된 양말과 속옷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에 체온을 유지하고. 보온 밥솥을 가득 채운 흰 밥 위로는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왔다. 욕심쟁이 신발장은 금세라도 터질 듯 신발을 가득 머금고, 거실 한편에 놓인 파란색 젖은 걸레에는 희뿌연 먼지의 흔적이 배어 있다. 싱크대 위에 수북이 쌓인 그릇들은 어제의 삶을 담아내듯 일상의 모습을 자아냈다.


쫄병 시절 해야만 했던 일들이 집안 구석구석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내가 힘들었겠다. 내겐 그 옛날 제대를 기다리며 해왔던 일들이었건만. 아내에겐 기약 없는 삶 속의 일상이었으니.


살아생전 아버지가 나를 대장이라 불렀던 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나는 대장의 삶을 잘 살아왔다.

오랫동안 일상의 고단함을 잘 견뎌 온 아내가 고맙다.

반짝반짝 수없이 빛나는 마음의 별을 품은 소중한 당신

이제는 당신이 우리 집 대장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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