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소설] 백한 번째 사람들-12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by 파란 벽돌

“뜨거운 물에 하는 목욕이 아토피에 좋지 않다면서....”

“아이, 아버지는 제가 지금 몇 살인데 아토피에요. 할아버지도 아토피 걸리나요?”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하고 혼자 키득거렸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갑자기 정색을 한다. 늙은 아버지 앞에서 실수했다 싶었나 보다. 나는 녀석을 탓하지 않고 함께 문을 나섰다. 누구나 집에 욕조를 갖추고 쉽게 탕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아파트 촌에서 대중 목욕탕은 이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집에서 목욕탕까지는 꽤 먼 길을 걸어야 한다. 목욕 가방을 들고 함께 걷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이 깊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나도 녀석도 어떠한 말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그 길은 실제 거리보다 더 멀었고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토요일 오전인데도 목욕탕 안은 조용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탕도, 샤워기에서 폭포수처럼 찬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냉탕도 모두 조용하다. 한증막도 조용하고, 심지어 고개 숙이고 자신의 몸에 얹힌 오물을 벗겨 내고 있는 이들조차도 무슨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치 음소거가 되어았는 화면마냥 한가한 주말의 목욕탕은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열탕을 찾아 몸을 담궜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조용히 흐르던 시간도 멈춘 듯 했다. 나는 먼 기억을 천천히 떠올렸다.


딸 아이도 의대를 가고 싶어 했었다. 아니, 오히려 아들 녀석보다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학습지 교사를 하는 어머니의 힘만으로 두 명의 의대생을 건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집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직도 대출이 남아 있던 조그만 아파트는 우리 네 식구의 마지막 버팀목이자 보험이었다. 딸 아이는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고 성숙한 아이였다.


“제가 원래 피를 보면 기절하고 그러는 타입이라서 의대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약대에 가려고요.”

딸 아이가 시험을 마치고, 장학금을 받으며 약대로 진학하기로 결정한 그날, 그러니까 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의 오래된 꿈을 갑자기 버리게 된 그 날은 어울리지 않게도 의대를 갈 수 있는 충분한 성적을 받은 날이었다.


그날 나는 그 아이의 방 앞에서 밤새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은 7년 동안 자신의 적성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은 분명 아니었다. 그 아이는 어리석지 않았다.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니 그날 잠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야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내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내의 베개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 대한 조용하고 치명적인 원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갑자기 식욕을 잃었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 우울증은 용기가 부족했던 나에게 그것을 채워줄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무능력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 자살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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