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남편: “나니까 당신이랑 살지, 누가 당신 비위 맞춰주며 살아?”
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당신이랑 누가 살아?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면서”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26년 차 부부인데도 가끔 남편이 낯설다. 어떤 인연으로 만나 아이를 둘이나 낳고 모든 것이 얽힌 채 살게 되었을까? 이 남자랑 결혼하라고 등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혼생활로 걸어 들어갔다. 살다 보니 예상과는 다른 면면들이 보이고, 안 맞는 구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듯한 계곡도 만나고 허우적거리는 바다에도 빠졌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한 공간 안에 있다. ‘밉다, 싫다’를 마음속에서 수천 번 웅얼거렸지만 결혼한 이후 한 번도 마음속에서 밀어내지 않고 여전히 그와 살고 있다.
중년이 된 지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남북한의 대치상태만큼이었던 때를 지나 요즘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웃음이 잦아지고 전에 없이 실없는 농담으로 아이들처럼 장난을 친다. 누구와 이런 관계를 맺어본 적이 많지 않은 나는 남편에게 기꺼이 흡수돼 버렸다. 남편의 순수하고 어이없는 농담과 소년 같은 장난이 싫지 않다.
항공권과 숙박 예약에 관한 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영문과를 나왔지만, 영어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 없던 힘이 갑자기 생겨나고 에너지가 속에서 샘솟는다. 뇌세포가 모두 깨어나 가동되며 24시간 멍하던 머릿속이 여행만 가면 맑아진다.
새로운 거리와 심지어 나무에도 감탄하는 나를 남편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수많은 식당 앞에서 결정장애를 일으키며 눈을 반짝이는 남편을 나는 귀여워한다. 우리 사이가 급속도로 헐거워진 건 여행을 통해다. 동행자로 남편이 괜찮을지 확신이 없을 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출발했는데 돌아와보니 닭살 부부가 되어 있었다.
남편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까다롭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내가 고른 숙소, 여행지, 음식, 교통편 그 무엇 하나에도 트집을 잡지 않았고 칭찬해주었다. 우선권을 주었고 조용히 따라왔다. 가는 곳마다 재미있고 볼거리가 가득하지는 않겠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마음 편하게 해주니 어딜 가도 불만이 없었다.
‘우리 남편이 원래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장점들이 보였고 의외로 순수했다. 자신이 못 하는 걸 내가 척척 해내는 걸 보며 대단하다고 존경의 눈빛을 쏘아댄다. 준비할 때의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여행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직장다니랴, 아이키우랴 고생한 세월을 보상받는 듯 둘이 떠난 여행은 즐겁고 행복했다. 다소의 실수와 서투름은 오히려 작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별 거 아닌 걸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고 평범한 거리를 걸어도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 즐거웠다. 연애 기간이 거의 없던 우리는 비로소 연애를 시작한 새내기 커플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배려하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여수, 도쿄, 타이뻬이, 부산, 경주를 남편과 다녀왔다. 둘이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었던 시절. 정상회담을 앞둔 대통령의 심정이 이랬을까? ‘이번 여행이 재미없거나 삐끗하면 다시는 둘이 여행은 못 가겠구나’ 비장하게 출발했는데 결과는 의외였고 만족스러웠다. 너무 재미있어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음에 갈 나라를 검색했다.
김영하는 ‘오래 기다려온 대답’에서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못 견디게 어디론가 이동하고 싶고 그곳에서의 모습, 장면, 자연, 사람이 궁금하다. 지나친 호기심으로 남편을 설득하여 데리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치는 걸 보면 아직 늙지 않은 것일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고 한편으로는 피곤하다. 남편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데리고 다니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