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하고 안전한 대만

4 days in Taipei

by 글로

‘헬레네, 나의 연인 헬레네에게 가야 해. 나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어. 내가 왜 이 하숙집에서 나가야 하지? 나는 빨리 헬레네를 찾아야 해’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를 읽고 있다. 비행기에서 세 시간은 지루하다. 눈을 감아도 시간이 안 가고 눈을 붙였다 떠도 겨우 20분 정도 지나있기 일쑤다. 자몽한 상태를 벗어나려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책을 편다. 여린 불빛 아래서 읽는 책은 내용에 상관없이 훔쳐 먹는 과일처럼 달다.

다시 인천. 밤이라 바람이 매서워 쫓겨나기라도 한 듯 밖으로 나온다. 택시 기사들만 몇 명 서 있을 뿐 밖은 한량없이 춥고 한산하다. 방금 지방 도시라도 다녀온 듯 대만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이 좋은 친척 집에서 편히 쉬고 온 느낌? 사람들은 어찌 그리 무구하고 담박한지. 거리도 안전하고 날씨가 내내 좋아 그런지 긴장감 없이 나른한 평화를 즐기고 왔다.


북적대는 곳은 피하고 싶다보니 여행의 목적이 공원 산책,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기, 로컬 식당에서 식사하기, 동네 구경하기, 초등학교 담장 밖에서 아이들 노는 거 쳐다보기, 마트 둘러보기 등이다. 사정이 이러니 “어디 가 봤느냐?” 라는 질문에 당황한다.

“동네 돌아다니고 공원 산책했어”

‘그 멀리까지 비행기 타고 가 공원 산책하고 동네나 어슬렁거리다 왔다구? 돈이 아깝네, 인생 샷 건지고 멋진 관광지 코스를 다녀 와야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네들의 생각이고 우리 커플은 우리만의 여행 스타일이 있다. 멋있다는 곳을 여러 군데 가 보았지만 공사 중이거나 사람들 등만 바라보다가 끝난 기억이 많다. 입구에서 줄 서야 하는 것부터 체질에 안 맞는다.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 익숙해서 줄을 서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었나보다.


어떻게든 줄을 안 서도 되는 시간에 가거나 줄을 서야 한다고 하면 포기해버린다. 일찍 움직이거나 사람들이 다글다글한 시간을 피해 핵심적인 것만 보고 나온다. 우리가 찾는 곳은 녹지가 많은 넓은 공원, 시민들이 사는 주택가, 동네 어디에나 있는 마트, 도심을 벗어난 외곽 거리의 카페등이다. 대만은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그렇게 4일을 편하게 보내고 왔다. 남편과 50 중반에 연애하듯 다니는 여행은 우리의 관계에 화려한 꽃을 피워주었다. 나에게도 이런 날 올 줄 몰랐다.

*자몽: 졸릴 때처럼 정신이 흐릿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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