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 올 줄 몰랐다!
재미있는 강사 덕분에 2년을 다니며 기초를 다졌다. 60%는 강사의 유쾌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파3(par3) 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옆에 있는 수강생이 골프채 사는 곳과 파3경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집과 가까운 분당에도 있고 인천에도 있었다. 파3는 드라이버를 제외한 나머지 클럽으로 경기를 할 수 있는 9홀 위주의 미니 골프장들이다.
강사와 함께 골프장에 가서 레슨도 받았다. 어떻게 매 홀을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재미보다는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퍼터를 칠 때는 각도와 경사를 봐야 하고 한쪽 눈을 감고 가늠을 해야 한다는데 초보에게는 어려운 수학 각도 수업과도 갔다. 벙커 수업은 또 어떻고. 아무리 모래밭 구덩이에서 샷을 날려도 공이 밖으로 올라가지 않고 미끄럼만 탄다. 뒤에 따라오는 팀이 있으니 시간을 끌 수도 없다.
중간에 20분 동안 급히 육개장을 먹으며 체력 소진을 보완해주고 다시 레슨에 임한다. 여름에는 얼음주머니를 목덜미 뒤에 올려놓는다. 이렇게 일을 하라고 하면 화를 낼 테지만 놀러 왔으니 더워도, 공이 자꾸 산으로 가도 웃음이 난다. 그게 뭐라고 넓은 공간에 조그만 구멍 하나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먼 곳에서 치고 또 치고 공을 날리며 다가오는지 웃음이 난다. 홀인원 한 사람들의 기분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아직 갈 길은 멀고 포기는 이르니 더 시도해보련다. 필드에서 골프채도 잃어버려 프론트에 가서 얘기한다. 골프채를 항상 앞에 두어야 하는데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다가 챙기지도 않고 다음 홀로 이동한거다.
골프장에 도착해서 푸른 잔디를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이 땅이 모두 다 내 것만 같고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낀다. 묶여있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감을 느낀다. 어쩌다 샷이라도 잘 맞아 정확한 지점에 이르거나 온그린 되면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진다. 집중해서 굴린 공이 컵에 쏙 하고 들어갈 때의 쾌감도 잊을 수 없다. 18홀을 돌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연습은 필수다.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봐야겠다.
한달에 한 번 꼴로 가는 골프장이 있다. 그린피는 1인당 10만원으로 비교적 저렴하고 노캐디로 하면 그린피와 카트비만 계산하면 된다. 9홀을 두 번 돌고 파3와 파5가 적당히 섞여 있다. 드라이버금지 코스에서도 연습삼아 드라이버를 치기도 한다. 둘이 쳐도 추가 비용을 내지 않으니 커플이 오는 경우가 많다.
이곳의 장점은 나무와 그늘이 많다는 거다. 비용에 비해 잔디 관리가 잘 되어있고 사람이 붐비지 않아 조용히 치고 오기 좋다. 아쉬운 것은 부대시설이 낙후되어 샤워만 간단히 할 수 있다는 거다. 경험해 본 골프장이 몇군데 되지 않으니 비교를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로 대만족이다. 우리가 숲속골프장이라고 이름 지은 이곳은 둘이 반나절 골프치고 식사하고 커피 마시고 오기 좋다. 집에서 2시간 거리에 있으니 오가기에도 부담이 없다.
남편은 무취미였다. 어느 것에도 큰 흥미를 못 느끼던 남편이 느즈막이 골프를 배워 모임에도 가입하고 한달에 두,세번은 필드에 나간다. 내가 흥미를 못 느꼈다면 자주 골프를 나가는 남편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을 수도 있다. 둘이 취미를 공유하니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 서로 본 좋은 영상을 공유하고 연습장에도 가끔 같이 간다. 결혼생활은 어떤 파도가 나타날지, 무슨 장애물이 갑자기 돌출될지 모른다. 평소에 관심사를 공유하고 기초를 쌓듯이 공유할만한 거리를 많이 다져놓으면 불행이 닥쳐도 친밀감으로 다소 부드럽게 헤쳐나갈수 있다.
남처럼, 평소에 공유하는 것 없이 생활에 대한 부분만 공유한다면 사건,사고에 봉착했을 때 서로의 주장만 들이대며 갈등을 크게 키울 가능성이 높다. 취미를 공유하고 관심사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나이든 부부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젊을 때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만 가도 재미있고 육아에 대한 대화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넘쳤지만 나이들수록 자녀에 대한 이야기도 줄어든다. 아픈 몸에 대한 얘기밖에 할 것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가끔 나가는 남편과의 공놀이는 기분전환에도 도움이 되고 머리를 비우고 오로지 공 맞추기에만 몰두할 수 있어 좋다. 탁트인 시야의 잔디밭과 산도 보고, 잘 치면 잘 쳐서 재미있고 못 치면 서로 위로해주느라 바쁘다. 플레이 할 때만큼은 부부가 아니라 플레이어로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공정하고 또 신사답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캐디가 없으니 서로 클럽을 챙겨주고 잘 치면 목소리 높여 ‘굿 샷!’ ‘나이스 샷!’을 외치며 응원해준다.
남편과 카트를 타고 서로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그래, 우린 이런 생활을 즐길 충분한 자격이 있어. 아프지 말고 재밌게 살자.’ 암묵적인 말을 해가며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 남편은 샷을 날리기 전 준비가 길다. 스탠스를 잡고 어드레스를 하는 시간이 길며 스윙 연습도 두 번씩이나 한다. 나와는 달리 생각이 많고 잘 치려는 욕심도 드러난다. 빨리 치라는 나의 성화에 못이겨 얼떨결에 샷을 날린다. ‘굿 샷!’이라고 외쳐준다.
세상은 여러 가지로 요지경이다.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되며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가 된다. 생각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남을 비난할 필요도 없는 것이,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하게 못을 박아버리면 훗날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 그렇다고 회색분자는 아니다. 융통성을 갖고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상황을 겪어보았다는 것이고 변화에 흔들려보았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틀에 가두면 자신이 만든 공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나도 이런 세상 올 줄 몰랐다. ‘굿 샷’을 외치게 될 줄...
아프지 않았다면 퇴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골프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남들의 일인줄 알았던 골프를 치기까지 망설임이 많았다. 지하세계로 마구 떨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새로운 무언가에 나를 던져야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변화와 혁신은 다시 삶을 지속할 용기를 주었다. 푸른 잔디에서 남편과 걸어갈 때 세상에는 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남편이 다른 사람처럼 신선해보이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상대방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변화는 필요하다.
‘역사를 보면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중요한 변화와 혁신은 근심 걱정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 진행 중일 때나 비극적 사건이 터진 후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충격과 불안에 휩싸였을 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 너무 고통스러운 결과가 예상될 때, 그때 혁신이 등장한다.’
출처: 불변의 법칙(모건 하우절, 서삼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