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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Oct 01. 2024

잉글리쉬 어게인(English again)

고등학교 2학년 첫 영어수업시간. 그 당시 갈색이나 노란색에 가까운 머리는 흔하지 않았다. 28년전 일이다.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영어로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아무도 영어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졸지 않았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영어실력 뿐만 아니라 외모도 강렬하셨다. 멋진 갈색머리, 지적인 안경테, 짧은 커트머리. 흡사 모델을 연상시키는 흔치 않은 외모. 영어말하기에 아무도 자신 없던 시절. 막힘없이 한 시간 동안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고 영어 수업에 대해 말하는 선생님을 본 적이 없다. 누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 해본 적도 없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그 누구도 반항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영어시간은 긴장 그 자체였다. 수업을 마치면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제일 힘든 수업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 덕분일까? 영어교사가 되고 싶었다. 학생들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얘기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영어공부가 재미있었다. 그때는 학원이 흔하지 않은 때고, 있다고 해도 경제적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사서 독학하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니 책을 독파했다. 그때는 ‘맨투맨 영어’ 교재가 유명했다. 5권짜리 맨투맨 영어문법책을 사서 보고 또 보고 열심히 보았다. 문제 풀고 왜 틀렸는지 혼자 연구하며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했다. 영어 실력의 기초는 그때 쌓았다. 점수가 다른 과목보다 잘 나왔다.     

 

임용고시를 치르고 영어교사가 되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된다. 모두 나처럼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배워야 하니 앉아있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과목이 아닌 학생들도 있다.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어려운 문제를 내도 풀어내는 똑똑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단어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있다.

      

공교육의 맹점은 맞춤형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때는 수준별 수업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실패다. 같은 문제로 평가를 받는데 수준별 수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중간 수준에 맞춰 수업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로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영어는 학생들에게 멀고도 어려운 과목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교사로 일하다 퇴임했다.     




-알바시작     

딸의 도움을 받아 알바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다. 유명하다는 사이트에 이력을 올리고 활동가능지역을 선택해 지원했지만 연락을 주는 곳은 없었다. 교육계 경력만 30년, 55세의 중년여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 카페에 지원했지만 반응이 없어 학원등에도 지원하였다. 오래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한군데 영어학습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고민도 되었지만 노는 것에 질력이 나 긴 숙고는 필요치 않았다. 일을 해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다. 3일동안 교육 받고 일을 시작했다.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다. 중학생만 가르치던 내게 낯설기는 했지만 영어를 오래 가르쳐서 그런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8시간이 일주일의 기둥이 되어준다.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4시간 일한다. 8시간이 168시간의 버팀목이 되는 셈이다. 

    

초등학생들 위주의 학원이라 파닉스를 시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파닉스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원장선생님이 하는 방법을 옆에서 보고 배웠다. 초등학생들에게 쉽게 파닉스를 깨우쳐주는 방법이 있어 놀랐다.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일의 필요성     

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여행가고 카페 가고 책 읽고 공연보고 할 것이 얼마나 많은 데 일을 해?’ 그러나 ‘일은 필요하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갈 곳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일한 댓가로 받는 돈은 찍히는 액수에 상관없이 소중하다. 내가 이 사회에서 아직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일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노는 기간이 길어지면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생각들과 싸워야하고 일을 하던 사람들은 날개를 접고 있을 뿐 날개가 없어진 건 아니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날개를 펴고 날아도 보고 싶다.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세이노가 고백하기를 부자들의 어려움 중 하나가 감탄이 없다는 것이란다. ‘일하지 않아도 되고 무얼 봐도 새로운 것이 없으니 힘들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지만 부럽지 않았다.  돈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들은 감탄이 없단다. 다 가질 수는 없다. 부족한 듯 해야 어쩌다 하는 여행이, 놀이가, 특이한 체험이 재미있는 거다. 


부자의 생활을 경험해본 적 없어 충분한 공감은 어렵지만 어렴풋이 상상은 된다. 그 또한 재미 없으리라. 돈이 많아 일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라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흥미도 없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꿈꿀 때가 좋은 것이다.   

   

멀리, 높이가 아니라도 어디든 한번 선회해보고 싶다. 유전자가 변형되지 않는 것처럼 일은 나의 온몸 DNA에 깊숙이 음각되어졌나보다. 압도할 만큼 과중하지 않은 일을 하는 건 삶의 밸런스를 위해,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던 영어를 가르치는 일, 오답을 알아보고 수정해주는 일, 발음을 고쳐주는 일, 왜 오답인지 설명해 주는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감사히 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다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 당신 손에 주어진 게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거기서 행복을 찾아낸다면 ‘만족을 아는’ 충족감으로 인해 마음은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그 맑은 마음과 파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생명들을 기쁘게 하고 끌어당길 것입니다.    

 

*출처: 초역 부처의 말 법구경, 코이케 류노스케, 포레스트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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