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생활을 할 때는 쉬고 싶었다. 일요일 오후 3시부터 우울해지고 새해 첫날은 캘린더에 있는 휴일이 며칠인지 체크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금요일은 하루종일 아무 사고 없이 업무가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마찰이 생기면 주말 내내 신경이 쓰이고 월요일에 가서 해결할 생각에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월요일 비오는 아침, 차가 막히니 시간에 맞춰 출근하기 어렵다. 추운 겨울, 여명이 있는 어슴프레한 이른 아침, 찬 기운을 뚫고 출근하는 기분은 중력을 거스르듯 부자연스럽고 힘들다. 어느 직장인이 월급을 수월하게 받겠는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하나 사서 소리도 요란하게 음미하며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집으로 다시 출근하면 아침 설거지가 그대로 있을 것이고 빨래를 개켜야하고 잡동사니 정리할 것들이 10가지는 쌓여있을 것이다.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급식을 대충 허기만 때울 정도로 먹었으니 배도 고프다. 뭘 먹고 들어가야 기분 좋게 집으로 갈 수 있을까? 거하게 먹을까? 열량 많이 나가는 디저트를 선택할까? 옵션이 많으니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다. 새로 생긴 중국집에 가서 멘보샤를 먹을까? 카페로 가서 소금빵에 커피를 한잔 할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마음도 식히고 위도 달래고 스스로를 한참 어루만진 후 집으로 향한다.
‘교사는 방학도 있고 철밥통에 왠만하면 해고도 당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수없이 들은 말이다. 그래서 그만두지도 못하고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버티고 견뎌내며 지냈다. 다른 일은 해 본적 없으니 다들 이렇게 사나보다 하며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서 일이 수월해져야 하는데 해마다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상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흐름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머리가 거부한다. 컴퓨터가 단 1시간만 안 되어도 업무는 마비되고 기기 고장으로 업무가 원활하지 않을 때는 답답하고 시간이 아까웠다.
항상 집안일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건 나의 직장이 세 개란 얘기로 확장되어 해석할 수 있다.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써야 하고 지원하고 관리해야 한다. 기쁨이 넘치는 일이지만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어느 순간 중요한 일을 빼고는 손을 놔 버린다. 그 정도로 번아웃이 왔다. 왜 출근을 해야 하며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목적도 목표도 잃어버리고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작은 쪽배처럼 그렇게 마음이 정처 없었다.
당장 일을 그만둔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그만둘 명목이 없었다. 죽을 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그냥 일이 하기 싫어서? 쉬고 싶어서?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주체적인 삶을 운운하지만 현실의 그물은 촘촘하게 엮여 있고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같았다.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산을 넘으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내장은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시야가 좁아져 검은색으로 변하며 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다행인 것은 초기라 꾸준히 관리하면 지금처럼 문제없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걸리다니? 두통 때문에 갔는데 중요한 녹내장을 발견한 것이다. 아침마다 안압을 낮추기 위해 눈약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후 10분간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더는 뛰고 싶지 않고 뛸 기운도 없었다. 계속 뛰어야 하는 줄 알았다. 계속 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고통을 뛰어넘어 자신을 이기면 쾌감이 느껴지고 해방감이 찾아온다는데 이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운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운이 안 좋으면 더 큰 병이 찾아올 수 있고 회생 불가능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계속 뛴 것은 잘한 일일까? 선택은 어렵다. 아프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타까워하고 도와주려 한다. 비난의 워딩도 날아온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했어? 그렇게 몸이 망가지도록 왜 가만히 있었어? 미련하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런 병이 생긴거야?’
‘내가 이만큼 힘들게 살았으니 고생과 희생과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해 주겠지?’ 라고 기대하지 말아야한다. 상처가 크고 깊다. 자기 몸은 자기만 알고 자신이 관리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상 증상으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위기가 찾아오자 깨달았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해왔지만 아픈 것까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는 가족은 없다. 꿀은 좋지만 꿀을 얻는 과정은 모른다. 티내는 건 싫어한다. 그러니 조용히 꿀만 제공해주길 바란다. 꿀을 제공하다 아프거나 죽은 벌을 돌보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찾아 나선다. 비유가 심했나?
일을 그만두고 쉬면 몸이 단박에 좋아질 줄 알았다. 순진한 생각이다. 몸이 망가질 때까지는 몸도 나름대로 버티고 버티다가 증상을 호소한다. 조금 힘들다고 조금 뭘 잘못 먹는다고 바로 몸이 아래로 쳐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호전되는데는 망가지기까지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거기다 빠른 노화는 일어나려는 몸을 자꾸 넘어지게 만들 것이다.
멈추고 나니 비로소 다른 길이 앞에 펼쳐졌다. 이 길 만이 유일한 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길을 선회할 때 주변의 눈치도 봐야 하고 자기 변명도 해야 한다. 죄지은 것이 없지만 죄인의 자세로 설명해야 한다.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당연히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일을 안 하는 상태가 비정상이 된 거다. 꾸역꾸역 이유를 말해야 한다. 왜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걸까? 이제 다른 레인에서 경주가 아니라 내 페이스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있다.
꼭 완주가 목표는 아니다. 출발했고 뛰었으며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된 거다. 순위 안에 들어야 하고 피니쉬 라인에서 테이프를 끊어야하는 건 아니다. 많은 마라톤 선수들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아프다. 자신의 신체 상태에 맞게 뛰어주어야 한다. 완주 여부보다 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성실히 꾀 안 부리고 뛸 만큼 뛰었으면 대단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걸으련다. 경주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