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이후 나름대로 바쁘게 지낸다. 월,금요일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화, 목요일에는 독서모임이 있다. 수요일에는 혼자 공연을 보거나 소셜링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다. 토요일에는 남편과 등산, 일요일은 교회로 향한다. 식구들 중에 제일 바쁘고 다양한 일을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바쁘다’ 소리를 달고 산다. 남편이 어느 날 말한다. “일하는 나보다 당신이 더 바쁜거 같애”
캘린더는 스케줄로 빡빡하다. 일정을 조율하려고 하면 모임 하나를 빼야한다. 다른 사람들도 스케줄이 만만치 않아 한번 모이려면 날짜 잡기 힘들다. 주말은 가족과 지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으니 피하고 평일 중 만나야 하는데 다들 운동이든 레슨이든 여행이든 일정이 있다.
초등학생들 영어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지만 급여가 뒤따르고 성취감이 있는 일은 필요하다. ‘아직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라는 것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중학교 학생들만 보다가 초등학생들을 보니 귀엽다. 순수함이 한없이 나를 웃게 한다. 사람을 똑바로 응시하며 열심히 얘기하는 눈망울을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오자마자 빨리 보내 달라며 응석을 부리고 꼼지락 대서 가보면 뭔가를 먹고 있거나 낙서를 하고 있다. 귀하디 귀한 생명체를 보는 기분이다.
*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 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내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 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 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 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 늙어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
마음만 먹으면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맑고 서늘한 날 2박3일 여행을 갈 수 있다. 하루종일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고 음악 들으며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공상을 하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딸들도 모두 성인이 되어 엄마를 찾지 않는다. 남편은 주말에만 오고 평일에 집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없으니 부엌에서 바쁠 일도 드물다. 집안일은 소소하게 있지만 누구 한 사람 지적하거나 더 잘하라고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머릿속을 짓누르는 고민거리나 서류정리등의 일도 없다. 학생들끼리 싸우다 일어난 갈등을 중재할 일도 없다. 마른 걸레 쥐어짜듯이 출제해야하는 시험 문제에 대한 강박도 없다. 오류가 생겨 온 직원들이 나만 째려보는듯한 압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해방과 자유란 이런 것이구나. 나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시간과 마음이 자유로워서 가장 좋은 건 예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되도록 일년에 두 곡을 발매하려고 노력한다. 전문 보컬 트레이너에게 레슨을 받는다.
“‘Love wins all’을 연습해보시죠”
“네? 제가요? 왜요? 설마 ‘아이유’가 부른 노래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요? 굳이, 왜요?’라는 요즘 유행한다는 아이들 말이 절로 생각난다. 보컬선생님이 '아이유'의 노래를 연습해 오라는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기대도 되었다. 아줌마가 부르는 '아이유'의 ‘Love wins all’은 어떤 색깔일까?
녹음하는 노래 연습을 하기에 앞서 다양한 고음지르기 노래를 해본다. 예를 들면 ‘이하이의 한숨’ 이나 ‘이은미의 녹턴’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등 하기 버거운 노래를 먼저 부른다. 그러면 녹음하려는 노래가 쉬워진다.
선생님은 나에게서 무슨 가능성을 보신 걸까? 불가능해 보이는 ‘아이유’의 노래를 연습해본다. 노래는 멋있고 애절하고 세련되지만 어려웠다. 내가 부르면 노래가 아니고 비명이나 절규에 가까웠다. 그래도 연습하는 동안 행복하다. 아줌마가 ‘아이유’가 왠말이냐고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선했다. 100% 똑같이 소화할 수야 없겠지만 난이도 높은 노래를 목표로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사람들은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한다. 돈이 되지 않으니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먹고 산다. 하고 싶었던 예술에의 욕망은 온데간데 없이 서류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느 노래를 들으면 못내 이루지 못한 꿈이 떠오른다. 어쩌다 미술관에라도 가면 좋아했던 그림이나 어릴 적 순수한 나이에 마주했던 스케치북이 떠오르리라.
느즈막히 이런 활동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분좋다. ‘오래도록 꾸준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실감한다. 노래를 녹음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지금, 완전한 중년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그 이상 더 바랄게 무엇이 있을까?
책방 북콘서트에서 노래도 불렀다. 평소 잘 가는 책방에서 ‘연인’이라는 책의 북콘서트를 할 때 오프닝으로 노래를 했다. 20여 명의 관객 앞에서 마이크 없이 MR에 맞춰 노래할 때 행복했다. 완전하고 순전한 행복을 느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유명해지거나 세간의 관심을 끌 일은 상상도 하지 않는다.
가사도 직접 썼으니 몰입이 잘 된다. 그 상황, 장소, 시간에 함께 한 사람들이 노래를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만으로 구름 위에라도 뜬 듯 행복했다. 다소 슬픈 노래라 웃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이미 저 세상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그때의 뜨거운 감정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이 정도면 화려한 백수 맞지 않을까?
*출처: 허송세월 (김훈, 나남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