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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24. 2024

'바람'의 기준

남편: 어... 에이, 아니야, 말하지 말아야겠다.

나: 어?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어? ‘나 여자 생겼어’이런 말 빼고 다 괜찮아.

   어디 숨겨놓은 아들이라도 있어?

남편: 키울 수 있지?

나: 잘 됐네. 우리 아들 없는데, 호호

남편: 하하     


26년차 부부. 매일 유치한 장난과 농담으로 하루를 열고 맺는다. ‘하루 10분 글쓰기’ 할 때 글감으로 ‘배우자 바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주제가 솔깃해 지인들과 모였을 때 테이블에 이 질문을 올린 적이 있다.     

 

‘문자만 주고 받아도 바람이지, 정신적 바람, 그게 더 무서워’ 
‘살림을 차려야 바람이지’    

 

다들 한참을 갸웃갸웃하더니 나름대로의 생각을 얘기한다. 나도 첫 번째 의견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몸은 내 옆에 있지만 머릿속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바람이다.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의 배우자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다른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닐까? 잠깐의 쾌락부터 가정파탄까지 바람의 정도는 다양하고 끝은 무시무시하다.  

    

* 싸움의 불문율은 괴물과 싸우더라도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가 때로는 괴물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괴물. ‘그것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문구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배신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함께 해온 시간들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겠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니 꼭 남의 일만도 아니다. 평소에 금술을 자랑하던 다정한 부부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참사라고 하니 더 귀가 솔깃하다. ‘당신 없으면 내 인생 끝장이지. 내 종교는 당신이야. 당신 없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남편이 괜히 의심스럽다. 

     

어제까지 함께 식사하고 웃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아이들 키우는 것에 대한 얘기로 세 시간을 얘기했는데 남편의 머리에 다른 여자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문제는 이걸 알았을 때의 대처법이다. 당해 보지 않아서 어떻게 행동할지 어떤 기분일지는 알 수 없다. 배신감은 그렇다치고 어떻게든 벌어진 일은 해결을 해야할 것이다. 우선 바람의 정도를 파악해보아야겠다. 몇 번 만났는지, 카톡이나 문자만 주고 받았는지 아니면 주기적으로 만나 사랑을 나눴는지 등을 알아볼 것이다.    

  



1.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한다.

2.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만 가정은 지키고 싶어한다.

3. 잘못을 뉘우치며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4. 잘못이라는 건 알지만 뻔뻔한 태도를 취한다.  

   

여기서 1번은 논할 필요가 없겠다. 마음도 몸도 떠난 남자를 굳이 잡을 필요도 그러고 싶지도 않다. 2번과 3번이 위험하다. 2번의 상황이라면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할까? 가정이라는 것이 모양만 ‘가정’이라고 써 있으면 되는 걸까? 평소에 진정성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나이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건 아닐거다. 의심은 어떻게 해결하지? 지속적인 무관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감정을 공유하며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고 모든 것이 얽혀있는 남편과 일관된 무관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걸까? 무엇을 위해서? 사회의 편견이 무서워서? 남들 보기 창피해서? 허울뿐인 가정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이들 보기 민망해서?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서? 

    

3번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선의 여지도 보인다. 자존심 상하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예전 조선시대처럼 ‘남자들 한 번 쯤 그럴수 있지, 뭐’ ‘앞으로 잘하면 되지’ ‘너그럽게 용서해줘’라는 말들을 떠올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는 것이 정답일까?     


4번은 1번 못지 않은 최악이다. 안하무인이고 방약무인한 인간과는 더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 사람이니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실수가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예의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부부로서의 관계를 이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몸이든 생각이든 다른 사람과 오래 관계를 맺으면 바람이다. 자꾸 생각 나고 함께 한 공간에 있고 싶으면 확실한 바람이다. 몸은 집에 있지만 머리 속으로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계속 연락을 주고 받으면 바람이다. 배우자가 그런 상황이라면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합리적으로 풀어야 하는가? 혼자의 싸움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복잡한 문제라면 더더욱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객관화가 필요하다. 조금 더 문제를 냉철하게 풀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먼저 시간을 두고 공간을 분리하고 떨어져 있어야한다. 남편에게도 생각과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그러면 문제가 더 선명해지겠지?

      

어떻게든 남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배신감, 자존심은 잠시 서랍에 넣어두고 냉정하게 문제를 직시한다. 꼭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단순하지도 않고 생각이 행동이 되기까지는 더 복잡한 과정이 있다. 그러니 그런 것을 꼭 나를 무시해서라거나 나에게 싫증이 났다거나의 단순한 접근으로 생각할 일은 아닌 듯하다.  

   

부부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일은 남북평화만큼, 아니 세계평화만큼 어렵다. 서로 참고 배려하고 인내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서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고 종국에는 다툼만 일어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왜 ‘바람’이라고 표현할까? 바람처럼 잠시 나뭇잎을 흔들다 지나가면 좋으련만....   

  

* 출처: 신영진 칼럼(돌아오려거든 그곳으로 오라) 2024.6.10.일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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