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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Oct 20. 2024

천국이 있다면

신주쿠교엔(신주쿠공원) 에는 벚꽃 외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많아 눈이 즐겁다. 하나 하나 모양도 다르고 매우 커서 계속 감탄하며 바라봤다. 일본, 프랑스, 영국식 정원이 있는데 모두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워낙 방대하고 넓어서 다리가 아파 감당을 못한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를 뿌린다. 이런 곳에서는 비를 만나면 색다른 기분이 든다.       


비도 피할 겸 휴게소로 들어갔다. 도시락을 준비해온 사람들은 도시락을, 빈손으로 온 사람들은 초밥을 사 먹는다. 우리나라 김밥과 비슷한 초밥과 유부초밥이 반반씩 들어있는 도시락을 만원에 팔고 있다. 우리도 점심은 파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커피 한잔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다. 통유리로 사방이 보이는 휴게소에서 너른 잔디와 꽃나무를 보고 있자니 비현실감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높은 건물로 둘러싸인 풍경만 보다가 도쿄 한복판에서 거대한 정원을 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신주쿠교엔에는 스타벅스도 입점해 있다. 잘 아는 카페지만 ‘이곳만의 특징이 있을까?’ 하여 들어가 보았다. 다들 같은 마음일테니 당연히 빈자리는 찾아볼 수 없다. 2층 자리에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으니 특별한 인테리어가 없어도 사람들이 많이 구경하러 온다. 아쉬운 대로 건물 밑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했다.      


짙은 분홍빛의 벚꽃에 녹색 로고의 스타벅스 간판이 어우러지니 멋스러움이 풍겼다. 벚꽃과 카페. 마음속에 비누 거품이 터진다. 좋은 거 더하기 좋은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장난이지만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이 없다. 이곳에서 본 풍경 하나만 눈과 마음에 담아가도 큰 수확이다.      




정원, 공원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호주 멜번의 보태니컬 가든 (Botanical Garden) 식물원과 정원이다.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멜번 모나쉬 대학교 유학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들리던 곳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나이가 들어야 좋아진다던 꽃과 나무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룡을 보는 느낌이 들던 정원, 정원의 도시 멜번 답게 온 도시가 정원에 자리를 내 주었다. 

    

공부와 영어에 치여 살던 시절, 보태니컬 가든이 없었다면 유학생활을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바다도 위안이 될 수 있지만 내게는 가든이 최고다. 트램을 타고 쉽게 가 닿을 수 있었다.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티룸(tea room)이 보인다. 오아시스같은 곳이다. 머핀과 딸기를 함께 디스플레이하는 센스. 머핀을 시키면 큼지막한 딸기가 옆에 함께 나온다.    

  

‘행복이 뭐 이런 것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야외에서 먹을 때는 참새를 조심해야 한다. 부스러기를 주로 먹지만 과감한 몇 마리는 테이블에 날아와 앉기도 한다. 아무리 쫓아도 그때뿐이라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거대한 호수 안에 블랙스완(black swan)도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장어 비슷한 것도 있다.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있어 쉬기 좋았고 입구와 출구에는 탐스럽고 키작은 작약이 화려한 색깔로 웃고 있었다. 주변 도로에는 늘씬한 호주인들이 조깅을 하고 있다. 여유로운 자연과 인간의 조화.

하루 종일 가든을 구경하고 산책하다 집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보낼 힘을 얻는다.    

   



코로나가 올 줄 전혀 몰랐던 2019년, 중학교 1학년 딸을 데리고 런던을 여행했다. 짧은 여행일정이지만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건 정원과 공원 방문이다. 런던도 녹지가 많으니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런던의 대표격 공원인 그린 파크 (Green park)에 갔다. 그린파크역에서 내리니 바로 공원이 펼쳐진다. 내리자마자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다. 규모에 놀라고 개방감과 커다란 나무에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른다. 머리 속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그래 이거야, 이거. 내가 꿈속에 그리던 장면, 이런 곳에 와보고 싶었어’라는 생각이 든다.     


조형물도 없고 너른 잔디밭에 아름드리 나무들만 자리하고 있다. 나무 밑 그늘에서 쉬며 책 읽는 사람, 샌드위치로 점심 먹는 사람, 요가하는 사람, 여행일정을 정리하는 듯 보이는 큰 배낭 옆의 사람, 저마다의 모습으로 공원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안에 있는 딸과 내가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저만치에는 망아지만한 개가 주인을 따라 산책하고 있다.     


무섭기도 했지만 공원이 워낙 넓으니 나와는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하다. 심지어  무료 아닌가? 이 거대한 구경거리를 돈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다니. 각 도시마다 공원만 방문한다면 크게 돈 들일이 없다.      

딸과 터져 나오는 감탄과 웃음을 있는 대로 흩뿌리며 공원을 돌아다녔다. 믿어지지 않는 규모와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이 순간만큼은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 나무와 풀과 꽃,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곁에는 사랑하는 딸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정원에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소유할 필요도 없고 가꿀 의무가 없어 바라보기만 해도 충만하다. 정원과 공원에서의 시간들은 유명한 관광지를 가지 않아도 충분히 여행을 의미있게 채워주었다.    

 



런던의 동네 곳곳에는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공원들이 있었다. 미술관에 가도 앞은 잔디밭으로 조성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날씨가 좋은 날이면 수건을 깔고 마트에서 산 샐러드나 샌드위치로 담소를 나누며 점심을 먹고 있다. 미술관에서 본 그림작품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 건 그런 장면들이다.  

   

공원, 정원 그리고 사람들이 있구나! 그 안에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아름다운 곳을 같은 시간대에 공유하며 즐기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천국에서도 외롭지 않게 사람들이 있어야겠구나!  우리에게는 자연도 인간도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섬에 혼자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지옥일 것이다. 함께 나누며 살아갈 사람이 필요하구다. 신주쿠교엔에서 머물렀던 공원이 떠올랐고 사람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절감하며 마음속에 꽃다발을 품고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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