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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Sep 21. 2020

공백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농촌유학 이야기


농촌유학 프로그램은 계절별, 절기별로 운영된다. 사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아는 것, 그게 내가 바라는 점이었고, 농촌유학이 추구하는 가치였다. 텃밭을 일구고, 지역의 농산물로 요리를 한다. 소백산 정상에 오르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한다. 숲 체험을 함께하고 지역 축제에 참여한다. 마을 자체가 이미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 여름에도 겨울에도 자연 그대로 놀이터가 된다. 모든 유학생이 밴드와 사물놀이 위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배우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내가 농촌유학을 선택한 것은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체험의 기회는 시골보다 도시가 나을 테니까. 오히려 내가 가치를 둔 것은 다양한 프로그램보다는 공백을 견디는 힘이었다. 스마트폰과 TV, 어쩔 수 없이 짜 둔 학원 스케줄에 익숙해진 아이는 잠시의 공백도 견디지 못했다. 약속한 시간 만큼 TV를 보거나 게임을 한 뒤에는 바로 이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심심해, 이제 나 뭐해? 잠시 만화책을 뒤적이다가, 또 이내 소리쳤다. 아 심심해!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거나 마냥 걷는 등의 일을, 내 아이는 견디지 못했다. 나는 그게 참 속상했다.      


한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사실 나였다. 밥을 입에 물고 씹지 않는 녀석을 다그치며 빨리 먹으라고 했던 것도, 밥상 앞에서 멍 때리지 말라고 혼냈던 것도 나였다. 양말을 한 짝만 걸친 채 지 생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서둘러야 한다고 말을 했던 것도, 학교 끝난 오후를 태권도 피아노 미술학원으로 빈틈없이 채운 것도 사실은 모두 나였다. 영수학원만 안 다녔을 뿐, 아이의 일과에는 쉼표가 없었고, 빈틈없이 해치운 날은 칭찬을 받았다. 아이는 공백 없이 야무지게 자랐고, 점점 공백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시골은 그 자체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씨를 뿌린다고 바로 싹이 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아이가 시골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사는 법,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를 바랐다. 시골 출신의 한 지인은 이런 나에게, 도시에서 나고 자라 환상을 가진 거라고 평했다. 너도 살아보지 않은 시골에서 아이가 배우기를 바라는 것 또한 욕심 아니겠냐고. 아이를 시골에 보내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너의 기질만큼만, 너의 그릇만큼만, 그대로 자라주면 족하다.
나의 서투름으로 어그러짐 없이, 온전히 네 모습을 찾으며 자라기를.
무엇을 배우거나 깨닫지 않더라도, 괄목할 결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네 몫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면, 나는 충분하다.


징과 기타를 배우고, 소백산을 오르며, 함께 자란 내 아이의 지난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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