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들 마을 어머니 화백

어머니는 치매가 걸리기 싫어서 화가가 되셨다.

by 베로니카의 참견

한 달에 한 번 방문 대상자이신 독거노인 C 어머님의 집 대문이 열려 있다. 1.4 후퇴하던 흥남부두 철수가 떠오르게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날이 어두워지니 서둘러 가정방문을 마치고 복귀할 생각이 간절하다.

"계세요?"

"소장님인가 보다! 들어와요!"

여름엔 가정 방문을 갈 때마다 집 앞 밭에서 '나 여깄어요'라며 고라니처럼 고개를 드시던 C어머님은, 겨울이면 엄지공주에 나오는 들쥐 할머니처럼 굴 속 같은 집에 들어앉아 화로를 앞에 놓고 사신다. 집 안에서 반색하는 응답이 나오자 부엌으로 난 미닫이 문을 열었다.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는 36절 스프링 무지 학습장을 무릎에 놓고 앉아 계셨다.

"잘 지내고 계셨어요?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장난"

부끄럽게 웃으시며 식탁에 올려놓는 스프링 학습장은 분명 군대 간 손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쓰다가 버리는 것을 가져오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종이 상자 안엔 쓰던 몇 가지 색이 안 되는 낡은 사인펜, 색연필이 들어 있다.

"손주들이 버린다고 내놓은 걸 내가 가지고 왔지. 색깔이 제대로 구색이 없어"

웃는 어머니는 밥 해 드시는 냄비만 한 가마솥에 불을 켜신다.

"아침에 밥 해 먹고 남은 누룽지인데 끓이면 구수해요."

어머니가 누룽지를 끓이시는 동안 어머니의 화첩을 구경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는 어머니의 화첩에는 빌딩과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하기도 하고 산과 나무와 꽃과 새들도 있다.

'새는 하늘 날고 새는 얼마나 시원할까'라고 쓴 그림 가운데 커다란 사람이 누구냐 물으니 '우리 아들'이란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토록 큰 존재이고 든든한 존재인가 보다. 자유롭게 하늘을 훨훨 나는 새를 부러워하는 어머니는 제한된 환경에서도 15년 간 남편의 병시중을 들었고 자녀들을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어엿하게 길러내셨다. 화분 속에서도 활짝 꽃을 피워낸 자신을 그렸을까? 잎이 하나도 없이 다 떨어지고도 꽃을 피워낸 어머니는 심장병이 있으시다. 그 옆에 화사하게 꽃이 핀 화분은 두 아이를 거느린 며느리일까?

내가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그리고 계시던 그림이다.

"심심해서 그림을 그리시는 거예요?"

"코로나만 아니면 아침에 밥 먹고 경로당에 가서 따뜻하게 놀다가 저녁이면 올 텐데, 집에 갇혀 있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이러고 있으면 치매 온다니까 이거라도 하고 있는 거야"

"색깔도 몇 개 없는 걸 가지고 정말 잘 그리셨어요!"

"잘 그리긴.... 그냥 장난하는 거지."

"어머니가 재능이 있으시네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나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데도 많았지. 공부만 많이 했으면 뭐가 돼도 됐을지 모르지."

"어머니 그림 속에 어머니 인생이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걸 이렇게 잘 표현하기도 힘들죠."

"그래요? 허허허....."

100점 맞은 아이처럼 활짝 웃으시며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내주시는 따끈하고 구수한 숭늉처럼, 어머니의 남은 인생도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너그럽게 도움이 되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진료소로 복귀를 위해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해넘이가 근사하다. 전들 어머니 화백님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오늘 하루가 흐뭇하게 저물고 있었다.


20211021_174328.jpg 오늘은 전들 마을 어머니 화백 그림 덕분에 해가 아주 천천히 너그럽게 따뜻하게 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