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모들은 자식을 하버드와 서울대에 보냈고 민사고에 보냈고, 하다 못해 명문 영어 유치원에라도 보냈다. 명문이라는 성과보다는 무언가를 노력해서 얻어 낸 결과물 그 자체가 부러웠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결과물은 다람이의 인사 하나였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노력이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간의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딸에게 줄 들꽃을 모으는 심정으로 육아와 함구증을 공부하며 글을 썼다. 브런치에 발행한 글이 10개를 넘어가고, 서랍장에 넣어놓은 글감은 20개를 넘어가는데 내 글에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낙담하기도 했다. 희망은 내게 틈을 내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육아는 장기 레이스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런 나에게 딸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빠의 노력을 안다고. 나도 이제는 아빠처럼 용기를 내보겠다고.
딸이 용기를 내 준 덕분에 나는 희망의 조각을 발견했다.
앞으로 얼마나 낙담을 할지 절망을 할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기억으로 나는 더 버텨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