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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6. 2024

방수 녹색 바닥, 노을, 성치산, 별

[그곳에 같이 갈래요?] 몽

일 년 정도를 매일 같이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찍었다. 그렇게 하면 외장하드 속 영상 클립들과 머릿속 기억이 일치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요즘 다큐멘터리 수업을 듣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절대 영화를 완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외장하드 속에 기억을 담는 장점이라면 언제든지 기억 속 순간을 되짚어 생생히 재생시킬 수 있다는 거다. 마치 뇌의 외부저장 공간을 하나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영화를 완성시키고 싶다는 간절함과 절대 완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좌절감 사이에서 꾸역꾸역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시킨다. 최근 순부터 저장된 기억의 파편들을 눈으로 훑으며 스크롤을 내린다. 그중 몇몇에 유독 눈길이 오래 머문다. 모두 같은 곳에서 찍힌 영상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클립을 하나씩 재생시킨다. 


#0343

빨간 후드집업을 망토처럼 두른 태림, 슬리퍼 신은 발로 방수처리된 녹색 바닥을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핑크빛 하늘. 해지기 전 몽긍몽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름. 늦 여름? 태림의 차림을 보아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화면 밖에서 기타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0013 - 야외 테이블 위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 노트북을 내려다보는 태림, 

        나     태림 씨 뭐해요?

        태림  글 읽는 척해요. 

        나     그럼 실제로는 뭐 하는데요?

        태림  멍 때려요.

        나     하늘이 디게 예뻐요. 볼래요? 강림이가 bgm도 깔아주고 있어요. 

0054 태림  한번 가볼까요?

0110 - 조금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기타를 치는 강림의 바로 옆에 선다. 강림은 아랑곳 않고 연주를 이어간다. 태림, 카메라에 대고 속삭이며,

        태림  잘 치네요 잘 쳐. 집중해서… 모르나 봐요. 언제까지 칠까요? 끝나면 불러주세요. 

(중략)


#0233

노을의 끝자락이 산자락에 걸려있는 순간. 하늘은 이전 영상 보다 조금 더 어두운 푸른빛을 머금고 있다. 역시나 방수 처리된 녹색 바닥과 그 위에 놓인 목재 테이블. 또 그 위에 서서 난간에 매달리고, 기대고, 앉아서 순간을 감탄하고 있는 서희, 서영, 진솔. 


0005 나     여러분 여기 나와요. 

0007 - 서영, 화면 안으로 들어오며

       서영   나도!

0013 나     결국 졸업하면 항상 떠오르는 건 이 장면이 될 테죠. 

0020 서영  저는 여기 하도 너무 오래 다녀서 저 산맥도 다 생각날 것 같아요. 

0025 - 노을이 저물어 가는 산맥을 비춘다. 

        나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 거 같긴 해요. 

        모두  맞아요.

(중략)


#0286

어둡다. 점점 까매지고 있는 하늘. 녹색 바닥이고 뭐고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영상에 대한 정보를 생각해낸다. 옥상. 희진이가 학교를 잠시 쉬기로 결정한 날이었고, 떠나기 전에 희진, 에스더, 나는 대화를 나누었었다. 아마 목재 테이블 위에 셋이 낑겨 누운 채로 점점 어둠에 눈을 익히다가 마침내 별을 봤던 거 같다. 


0030 희진   애들아 우리 8월에 만나면 뭘 이루었을지 생각해 보자. 

        나      지금 찍고 있는 다큐를 어느 정도 완성했을까? 

        에스더 나는 그러면… 공모전에 하나는 붙고, 글 좀 많이 쓰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더 나빠지지 않을게

0045 희진    우리 지금 약간 영화 같아.. 약간.. 청춘 같아

        에스더 청춘영화 주인공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지?

        희진    청춘영화 주인공? 몇 개월 뒤 다 이뤄. 

(중략)

0220 나       애들아 우리 그냥 대학 가지 말까? 

        에스더 그냥 자취해서 같이 살까?

        희진    응 너네 대학 갈 거 다 알아~

(중략)


#0480

밝은 낮의 옥상. 공강 시간이 겹치는 민하와의 인터뷰. 모의고사를 치르던 날이었던가, 점수가 떨어져 생각이 많아 보이던 민하와… 다큐각을 잡던 나. 


0004 나       그래서 뭘 했다고요?

        민하    영어 모의고사 봤습니다. 

        나       어제 영화를 두 편이나 봐서 영어 리스닝 좀 하지 않았었나요?

       민하    그건 뭐…영화는 다 자막이 나오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어요. 하, 영화를 두 편 봐서 등급이 이렇게 나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0055 나        영화라도 보는 게 어때요?

       민하     영화라도 볼까요? 근데 저 저녁 먹고 대학 수시 전형이나 찾아보려고요. 최저는 버리고, 이제 수능을 버릴 각을 잡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의미 없는 수능 공부를 계속 할바에는…

(중략)


졸업하고 떠나온 학교를 생각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방수 녹색 바닥, 노을, 성치산, 그리고 별이 한자리에 있던 옥상을 떠올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잔뜩 신이 나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일, 매일 해가 지면 보는 노을이지만 하루하루 반복해서 감탄하던 일, 노을이 사라지는 산자락 너머를 염원하던 일, 몇 개월 뒤의 미래를 약속하던 일, 그것조차 버겁게 느껴져 그저 노을이나 별을 한없이 보던 일… 많은 순간과 대화와 감정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정말 떠나왔을까? 외장하드를 열어 그때의 기억을 재생시킬 때면, 쏟아지는 이름 모를 감정들이 조금 버겁게 느껴진다. 동시에 나는 37만원을 주고 고장 난 외장하드를 복구하며 영화를 완성시키겠다고 꿈틀댄다. 그토록 염원하던 산자락 너머의 세계로 온 것 같다가도 어느새 성치산 안쪽의 작은 마을로 되돌아간다. 내 기억 속에 담긴 일들, 영화에 담길지도 모를 일들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다. 이제는 내가 왜 그렇게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찍었는지, 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방수 녹색 바닥, 노을, 성치산, 별을 앞으로도 오래 생각할 거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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