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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6. 2024

「VLOG」전시 관람 브이로그�‍�/서울 시립...

[그곳에 같이 갈래요?] 묘

「VLOG」 전시 관람 브이로그�‍�/서울 시립미술관�/교양쌓기�/시청데이트코스�/일상브이로그


초점 없는 눈과 복잡한 머리로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부여잡고 겨우 걸어 나오면 지금까지 본 인간사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듯 강렬한 태양이 내 눈을 하얗게 멀게 만든다.

어질어질 (털썩)


아무 의자에나 주저앉아 눈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마침 구름이 지나가기 시작하고 아주 천천히. 바깥쪽부터 천천히 인식되기 시작하는 정보들을 조합한다. 흰 계단. 내 보라색 운동화. 흰 바닥. 내 검은 가방. 흰 천장. 내 패턴 치마. 흰 벽. 내 카키색 셔츠. 쇠 난간. 내 빨간 손톱. 정면의 큰 창문 세 개로 들어오는 빛. 내 갈색 머리카락. 천장의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내 빨간 핸드폰.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각 객체가 드디어 한 덩어리로, 실재하는 공간과 그 속의 나로 인식되고 곧이어 각 표면의 기억과도 연결되기 시작한다. 내가 방금 뭘 봤지? 유기적…. 환기.. 연결망.. 알튀세르적 접근.. 지지체의 해체.. 부정적 개념의 재사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온통 흰 공간에 대비되어 내가 비로소 선명하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가시광선을 반사하는 공간 속에서 어떤 가시광선을 흡수하는 존재자로 존재함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이것은 미술에 대한 글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미술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글이다.


나는 종종 서울 시립미술관에 간다. 다른 미술관과 갤러리에 갈 때와는 다르게 시립미술관은 미술관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립미술관의 큐레이팅과는 이상하게 잘 맞지 않는다는 단점이 거의 모든 전시가 무료로 진행된다는 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장점과 만나 집중하지 않아도 부담 없음! 이라는 슈퍼 장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약속 시간이 붕 뜨거나 집에서 하릴없이 누워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 그냥 무의식적으로 흠…. 미술관 보러 가야겠다…. 하며 시청으로 향한다. 이렇게 된 김에 우리 같이 미술관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 보자.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진행되고 있는 전시의 포스터가 발린 크고 당당한 벽과 계단이다. 오른쪽으로는 이미래 씨의 작업이 철커덩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브로슈어를 뽑아 들고 왼쪽의 전시장 입구로 들어간다. 전시 동선은 왼쪽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 출구로 나가는 것. 최근 들어 시립미술관은 유기적인 전시 동선을 지향하는듯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큰 벽에서 가벽으로 시선을 옮긴다. 우리도 그에 따라 움직인다. 미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음 …. 미술이네……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작품 앞에 서서 사진을 오백 장씩 찍어도 음… 찍는구나……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움직이자고. 빠른 걸음과 흐릿한 눈빛은 없으면 섭섭하다. 여담이지만 시립미술관의 1층 전시관은 눈감고도 그릴 수 있다. 아래 증거를 첨부한다.    

1층 전시장의 출구로 나오면 정수기가 보이고 그 뒤로는 철판 구조물이, 그 사이사이로는 이미래 씨의 작업이 더 가까이에서 보인다. 철커덩 소리 역시 더 가깝게 들린다. 이제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간다. 중앙의 계단을 타고. 이때쯤 아 .. 그냥 집에 갈까 .. 싶어지지만, 다리는 관성으로 계단을 착착착 밟아나가고 오른쪽의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음 … 미술…… 출구. 두 번째 전시실 입구. 음… 미술…… 출구. 천경자 씨 상설전은 쿨하게 건너뛰자. 마지막 전시실 입구. 음… 이제 슬슬 짜증이 나고 다리가 저리고 그 좋다는 미술은 계속 나에게 너는 여기 속할 수 없다고 사실 여기에는 첨예한 젠더의 문제가, 자본의 문제가 얽혀있다고, 그러니까 결국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사실 그건 너의 피해망상일 뿐이라고 동시대 미술은 모두에게 평등하며 모두가 창작자이며 동시에 관객일 수 있다고 속삭인다. 머리가 복잡하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다. 그래도 미술 ……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 눈앞에는 출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다리는 계속 착착착착 걸어 나간다. 눈이 건조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눈을 하얗게 멀게 하는 강한 빛/ 맞춰지는 인식의 퍼즐/ 연결되는 기억과 몸과 공간)

내 감상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2층 마지막 관의 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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