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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6. 2024

초록의 한낮

[그곳에 같이 갈래요?] 서로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서는데 오늘따라 몸이 무겁다. 생활관에 올라가서 양치나 할까 하다가 발길을 틀어 식당 옆 오르막길에 든다. 조금 오르다 보면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밝은 집으로 이어지는 길, 왼쪽으로 꺾으면 숲으로 들어가는 길. 꺾지 않고 곧장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운동장.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달짝지근한 향기. 길 양옆에 있는 계수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고개를 들어 동그란 하트 모양 잎으로 가득 메워져 있는 하늘을 본다. 잎 사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하늘이 천천히 흘러간다. 동그란 잎들이 저마다 반짝거리며 사랑해, 사랑해 한다. 


터널 같은 계수나무 길을 지나면 탁 트인 운동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운동장’ 보다는 초원, 들판, 너른 뜰 …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 푸르른 기운이 와락 몰려온다. 꽉 막혀 있던 온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포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부터 자꾸만 나를 궁지로 몰아넣던 마음이 어느새 사르륵 힘을 뺀다. 한껏 가벼워진 걸음으로 운동장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슬렁슬렁 걸어서 운동장 한가운데 선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빙그르르 돈다. 운동장을 빙 두르고 있는 각기 다른 모양새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천천히 돌면서 나무들과 눈인사를 한다. 그러다 눈길이 멈추는 곳은 운동장 구석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오늘도 차르르거리며 떨고 있다. 바람이 나무를 스윽 훑고 지나가면 나뭇잎들은 더 세차게 반짝거린다. 짙은 초록 얼굴 뒤에 있는 하얀 얼굴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쏙 들어가는 것을 반복한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나무의 찬란한 유희를 본다. 나무와 나, 둘만 세상에 남은 것만 같다. 바람이 나도 스윽 훑고 지나간다. 싱그러운 공기가 내 몸 구석구석에도 스민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벌렁 눕는다. 몸에 닿은 잔디가 까슬하다. 가만히 누워있는다. 잔디가 점점 폭신해지는 것을 느낀다. 눈을 감고 눈알을 천천히 굴린다. 눈을 감았는데도 세상이 온통 진하게 환하다. 미세하게 어지럽다. 뭉근하게 익은 눈을 슬며시 뜬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구름을 눈으로 쫓다가, 금새 시시해진다. 등과 다리에 묻은 잔디 자투리들을 툭툭 털면서 일어난다. 이제 내려가야지, 가만 보자 … 5교시는 실습이니까,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 운동장을 나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체육 창고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시계를 본다. 1시 17분. 슬슬 내려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란다. 1시 10분에 강당에서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까먹었다. 망했네. 


잠시나마 헐렁했던 몸이 금새 빠릿빠릿해진다. 급하게 걸어나가다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대로다, 모든 것이. 그러니 괜찮을 거야. 씩씩한 척을 하며 싱긋 웃어 보인다. 이내 몸을 돌려 계수나무 터널에 성큼성큼 들어선다. 흙길에 떨어진 동그란 잎을 밟으면서. 신발 밑창에 묻은 달콤한 향기가 온종일 나를 따라다닐 것. 그러니 괜찮을 거야, 하고 마음을 꼭꼭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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