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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10. 2024

토마토 파스타

[좋아하는 만큼 크게 외치기] 몽

아빠와의 관계는 토마토 파스타에서 시작된다. 공주, 아버지 배고파서 돌아가시겠다! 토마토 파스타나 해먹을까? 나보고 토마토 파스타를 하라는 말이다. 나는 군말 않고 요리를 시작한다. 양파와 마늘을 올리브오일에 볶다가 알싸-달달한 향이 올라오면 매콤한 맛을 위해 페페론치노를 조금 부셔 넣는다. 토마토 파스타에 토마토가 빠질 수 없지! 깍둑 썬 토마토를 넣고 앤초비와 케이퍼로 감칠맛을 더한다. 면수 넣고 조금 끓이다가… 홍합, 투하! 이때 화이트 와인이나 버터를 넣어주면 맛이 더 깊어진다. 자자… 이제 홍합이 입을 벌리면 면 넣고 휘적휘적~ 한다. 그러고 나면 커다란 팬에 웬만한 파스타 가게 4배 정도 되는 양의 토마토 파스타가 완성된다. 참, 아빠 루꼴라 좀 넣을까요? 루꼴라를 숭겅숭겅 썰어 토핑처럼 올리고, 치즈 갈아주면 진짜 완성이다. 엄마! 진짜 안 먹어? 어차피 먹을거면서 맨날 안 먹는다고 해. 엄마가 마지못한 척 식탁에 앉는다. 


내가 10살이던 무렵 아빠는 취미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경제활동을 하는 가부장의 취미 생활은 꽤나 본격적이어서 집안은 머지않아 온갖 서양 요리에 사용되는 식자재와 요리기구로 가득 찼다. 넓지 않은 집을 알차게 관리하던 엄마는 아빠의 취미 생활에 주방에 대한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아빠의 물건들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옛 물건들을 필요에 따라 선별하고 버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중간중간 아빠와 나의 끼니를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왔다. 아빠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의 선생님들, 내 친구 엄마들, 교회 목장 식구들… 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아빠의 요리를 맛있게 먹으며 내게 말했다. 예주는 아빠 덕분에 이런 멋진 요리를 맨날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그런 말에 나는 주로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아빠가 내심 자랑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다시 토마토 파스타가 차려진 식탁. 내가 만든 파스타를 한 입 먹은 아빠는 살짝 감탄하며 말한다. 오, 공주 이제 제법 아빠 흉내를 내내! 그리고 추억에 젖은 눈빛을 하고는 또 말한다. 크으 루꼴라 향 죽인다. 고향의 맛이야. 거짓말이다. 내가 알기로 아빠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고 아빠는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이탈리아 요리 아카데미에 유학 가겠다고 한 적은 있지만 엄마가 가장의 책임을 다하라며 못 가게 했다. 그렇다면 아빠가 말하는 고향은 어디인가? 고향이 지금은 떠나온 과거의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거라면, 루꼴라가 상기시킨 아빠의 고향은 본인이 활발히 취미 요리를 했던 시간 일 거다. 취미 요리치곤 성대한 아빠의 요리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던 때, 여유롭진 않지만 큰 걱정도 없이 이런저런 음식을 요리해 보고 딸을 먹이는 낙이 있던 때. 그 시간은 나에게도 어떤 추억으로 남아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엄마가 갑자기 날 필리핀 어학연수에 보냈다. 영문도 모른 채 필리핀에서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빠가 제2의 인생으로 식당을 차렸다는 소식이었다. 아빠가 차린 건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도 치킨집도 아닌, 프랜차이즈 베트남 쌀국수 집이었다. 엄마 아빠의 결정이 난 단 하루도 이해 가지 않았지만 내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빠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내가 중학교 2학년에서 대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5년을 작은 상가의 작은 주방에서 하루 종일 쌀국수를 만들었다. 설과 추석을 제외하면 쉬는 날 없이 쭉 그렇게 했다. 좁고 떼가 낀 주방, 바닥은 미끄럽고 습기와 열기가 자욱한 곳. 5년 동안 그곳은 아빠에게 허락된 세계의 전부였다. 어느 날부터 아빠는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았다. 그러자 아빠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빠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아빠가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고 엄마와 내가 하는 말을 귀에 담는다. 루꼴라부터 시작해 온갖 과거 이야기를 하다 이제는 케이팝과 오징어게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징조다. 이러다 노래도 부르겠어. 나는 여기에서 페미니즘, 비거니즘, 어떤 이즘 이야기만 안 하면 된다. 저번에 한번 이야기했다가 대학 가서 쓸데없는 짓하다 인생 망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빠처럼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살지는 않을 거라고 받아쳤고, 그 순간 모든 게 끝이었다. 오늘 저녁은 토마토 파스타의 노력을 물거품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옆에 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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