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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10. 2024

잡것예찬

[좋아하는 만큼 크게 외치기] 서로

“완성에 가까운 것이 주어질수록 우리의 시간은 자꾸 비어 가고, 어쩐지 더 심심해지는 것 같다. (중략)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가, 끝내 무엇이든 되는 것을 가지고 온종일 놀아보고 싶다. 이를테면 이불이나 모래처럼, 가볍지만 커다랗고, 작지만 무한한 것으로. 나의 틈을 견디는 것은 나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 휘리 / 어떤 잡지에서 옮겨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음


서울은 늘, 나를 어디론가로 움직이게 한다. 따릉이, 지하철, 버스, 따릉이, 따릉이, 그리고 내 두 다리.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들은 내 눈앞에 새로운 풍경을 펼쳐 놓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또 여기로. 산만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김없이 길을 잃고는 한다. 하루는 따릉이를 타고 가다 도저히 눈대중만으로는 길을 찾지 못하겠어서, 카카오맵 음성 안내를 켰다. 가방에서 잔뜩 꼬여 있는 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지도 안에 있는 젊은 여성이 나에게 자꾸만 띠링거리며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했다. 그 소리를 지겹게 들으며 한참을 달리다 결국 음성 안내를 끄고, 아침에 듣다 만 팟캐스트를 튼다. 몇 분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할 얼굴들과 풍경을 눈으로 힐끗힐끗 훑으면서, 귓등으로 는 잡담이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둔다. 묘하게도,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느낀다. 


며칠 전에 누군가 나에게 ‘새로운 공간에 가면 어떤 것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나요?’ 하고 물어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강 대답할 심산으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떠오르는 생각을 팅팅 튕겨내다가 턱, 하고 머릿속에 걸려든 생각. 잡것! 내 시선과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결국 잡것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생각. 생각이 밀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그대로 두고, 어영부영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잡것들에 눈길이 가는 것 같아요. 잡스러운 것이 좋아요.’ 내 앞에 있던 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잡스러운 것 ….’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마 그 사람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이 겉보기에는 비슷하나 실은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 괴리감이 우리의 말끝을 잡아끌었을 것이다. 엇나가는 말로 가득 채운 대화는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잡념만을 불러일으키는 잡소리를 서로 내뱉는 것에 싫증이 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꼭 다문 입안에, 생각 샘에서 새어 나온 잡념이 고이기 시작한다. 잡소리, 잡지, 잡담, 잡초, 잡동사니, 잡학, 잡곡, 잡일, 잡것. 잡것들! 


서울살이 한 달 차. 나름대로 서울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서울은 틈이 많은 곳 같다. 틈새를 비집고 살아내는 ‘잡것들’이 넘쳐나는 곳, 서울. 온갖 잡것이 모여드는, 틈새 가득한 공간 중 내가 가장 애정 하는 곳은 다름 아닌 시장이다. 서울에서 살 집을 구할 때 (나에게 많은 선택지가 있지는 않았지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건이 ‘집 주변에 시장이 있는지 없는지’ 였다. 운이 좋게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시장에 있는 집을 구했고, 뻔질나게 시장을 들락거리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시장을 거닐면 안식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사람들 사이를 잽싸게 지나는 고양이, 빨간색 파란색 함지박에 담겨 있는 올망졸망한 채소들, 채소만큼이나 귀여운 손글씨들, 수북이 쌓여 있는 튀김들과 그 옆에 보글보글 끓는 빨간 떡볶이, 온갖 잡동사니 같은 물건을 늘여 놓고 꾸벅 ~ 꾸벅 조는 할아버지. 그 사이를 휘젓고 걸어가는 나. 그제야 숨통이 탁, 하고 트인다. 


생각해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사람과 먼지로 가득한 서울에서 숨 쉴 구멍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들인 취미들만 모아보아도 참 … 잡스럽기 그지없다. 팟캐스트에서 ‘잡담’ 듣기, 잡지클럽에서 ‘잡지’ 읽기, 그리고 비즈 팔찌 만들기 같은 ‘잡일’ 찾아서 하기. 이것들 덕분에 나는 요즈음 심심할 틈 없이 지냈다. 한달 새 88편인 팟캐스트 시리즈를 다 듣고, 잡지클럽의 회원(?)이 되었으며, 벌써 100개 남짓한 팔찌를 만들었다. 이유나 목적이 있어서 하는 짓거리가 아니라 언제 그만둘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잡다한 일들을 우당탕거리며 할 때 내 일상에 생기가 돈다는 거다.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간을 주워담다 보면 무엇이든, 그게 무엇이든 결국 무언가가 것이라는 어렴풋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잡것들 가까이에서 감각하는 것에서 오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동질감에서 오는 안정감이려나.


언제부터 잡것들에 대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을까. ‘정상’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을 느끼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 테두리 밖에 있다고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은 아마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서울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평일 오후 시간대, 지하철 안은 꽤 한적했다. 지하철 문 앞에서 서서 평소와 다름없이 동생과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디선가 빤히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하철 안을 휘익 둘러보니 어떤 중년 여성분이 좌석에 앉아 지긋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화악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은 꼬맹이인 우리가 그저 귀여워서 쳐다보고 있던 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땐) 내가 비웃음을 사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에게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웃기게 들리는구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사투리 억양은 내가 서울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후 한동안 서울 공공장소에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순식간에 나는 ‘지방 잡것’이 되고 말 거라는 확신이 내 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지금도 누군가의 눈에 나는 완전한 잡것일테다. 듣도 보도 못한 대안학교 출신에다, 지금은 ‘지잡대’를 휴학하고 돈도 안 되는 다큐를 찍겠다고 서울에 올라와 있다. 동생 말마따나 ‘거적때기’ 같은 빈티지 옷을 즐겨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니는 날이 더 많다. 취업 생각은 딱히 없고, 그렇다고 진학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에이, 잡것!’ 하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참 좋다. 아름답다. 잡것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아름답다. 화려함은 덜하지만, 수수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이 있다. 백미밥보다는 잡곡밥이, 작물만 심은 흙보다 다채로운 잡초가 난 흙이, 한 가지만 잘 아는 사람보다 다양한 것들을 엮어내며 새로운 앎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건강하다. 서로의 잡스러움으로 빈틈을 채워갈 때 세상은 한층 사랑스러워진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잡것인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나와 함께 한바탕 놀아보자고, 그것도 아주 잡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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