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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6. 2024

요새

[그곳에 같이 갈래요?] 호두

어쩌면 꽤나 심각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저번에 쉽게 나왔다던 중간고사에는 내가 아는 문제는 없었다. 나에게 핸드폰의 용도는 밖에서 무언가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장식품인 것 같고, 나에게는 딱히 목표로 하는 미래도 없는 것 같다. 진짜 이대로 가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근데 뭐 어쩌겠는가? 나는 누워있는데


누워있다. 딱히 그 이상의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헝클어진 이불 위에 두 개의 베개를 끼고 어정쩡하게 누워있는다. 문은 잠겨있고 방 안에는 오래된 벽장 시계의 철커덕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만 난다. 책상 위에는 수학 문제집과 여러 학습지가 보란 듯이 펼쳐져 있었다.


방에 철커덕 이외의 큰 소리가 울린다.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뻐근한 몸 일으켜 아들의 도리를 지킨다. 그리곤 하품하며 나의 요새로 돌아온다. 돌아와 앉아 너저분한 책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저거 아직 초반밖에 안 풀었지 않았었나? 애초에 풀었던가?”


다시 누워있다. 곧 시험이다. 저번에 시험을 망치고 무언가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다지 기억에 남는 다짐은 아니었나 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두통을 떨쳐내기 위한 진통제는 거실에 있다.. 그냥 좀 더 누워있기로 한다.


그렇게 시간을 좀 죽이다 보면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신다. 체감상 꽤 오랜만에 방 문턱을 넘는다. 식탁에 나까지 앉으면 주로 한자리가 빈다. 형은 주로 학원에서 늦게까지 있기에 같이 저녁을 먹지 못한다. 슬슬 형이 존경스러워지는 단계다. 내가 이리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2년이나 먼저하고 있다.


앉아있다. 너저분한 책상을 조금 정리하며 온전히 수학 문제집을 풀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수학 문제집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느 정도 그러고 있다가 의자를 돌린다. 문제집을 등지고 의자위에 쪼그려 앉아 음악을  듣는다. 3곡 정도 듣고 정신을 차리면  나의 요새로 돌아간다.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나보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어졌다.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간다. 보다 깔끔해진 얼굴로 나와 어두워진 거실에서 로션을 바른다. 로션을 바르고 옆에 창문으로 아침과는 다른 풍경을 감상한다. 그리곤 창문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었다. 기도했다. 내가 변할 계기를 만들어 달라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려 달라고, 내일이 오지 말라고, 내가 기도 드리는 당신이 존재해 달라고


조용히 나의 요새에 돌아왔다. 헝클어진 이불을 덮고, 베개를 재배치하고 누웠다. 편안히 눈을 감고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 다짐을 중얼거린다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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