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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16. 2024

나는 하루 더 늙어보기로 했다

[나는 하루 더 살아보기로 했다] 묘

7년 전에 이런 목표를 정했다. 문신 많은 할머니로 살아남기.

좀 웃기지만 나름 엄청나게 머리를 써서 만든 목표였는데, 문신 많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1. 문신을 많이 할 경제적 능력 (문신은…. 꽤 비싸더라….)

2. 한정된 몸에 최대한 아름답고 어울리는 문신을 고를 조형능력/안목

3. 아직 문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으므로 직업에 한정이 있을테니.. 비교적 문신에 자유로운 프리랜서 창작자로 살아가려면 그에 걸맞는 작업 능력과 부지런함 사회성 등등을 갖추어야 함

4. 할머니가 되어야 하므로 죽임당하지 않고 죽지도 않아야 함

5. 문신 많으면 혈관 찾는 것이 어려울 테니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함

6. 내가 할머니가 되기 전에 인류가 멸망하면 안 됨

을 충족해야 하며 무엇보다 무섭고 괴팍한 할머니가 되어 고립되면 너무 슬플 테니 사람을 향한 상냥함과 센스를 잊으면 안 되는 .. (큰 아름다움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나 해야 할까?) 나의 뜻과 하늘의 뜻이 좋은 방향으로 얽히고설키지 않는다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란 말이다. 7년 전 이 목표를 세운 이후로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를 잘 가꾸는 동시에 하늘에도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아니 나 예수랑 2003살쯤 차이 나는 동생인데, 솔직하게 네가 나 만들었으면 책임은 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뻗대는 중이다.


5년 전에는 장례식장에서 틀 노래를 정했다. Mott the hoople의 all the young dudes

다 늙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구닥다리 젊음을 향한 찬가 - 그러나 몇 년 안에 세계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는 속뜻을 지닌- 가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 즐거울지…. 벌써 낄낄거리며 저승길을 춤추듯이 걸어가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만 시간이 지나 몇 번의 장례식을 경험해보니 장례는 고인의 뜻보다 가족/지인들의 뜻을, 가족과 지인의 뜻보다는 장례회사의 규율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허다함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 대신 장례회사와 싸워줄 든든한 친구를 찾아 그와 우정을 탄탄히 쌓아두어야 하고, 혹시라도 기억에 문제가 생겨 내가 장례식에 쓸 노래를 정해두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 그 사실을 일깨워줄 사람을 구함과 동시에 치매 예방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스스로 죽어버리고 노래 틀어달라고 하기엔 양심에 찔리니까 절대로 자연사해야 하고, 갑작스러운 사망은 음악을 틀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으니 건강관리도, 하늘에게 나 좀 책임지라고 소리 지르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작년에는 죽기 전에 낭독하고 싶은 시를 골랐다.

강보원의 완벽한 개업 축하 시

아래는 그 시의 일부이다.


(…)

그는 반으로 쪼개진 / 양파 같은 / 희고 / 매콤하고 /사각사각 거리는 / 개업 축하 시를 쓰고 싶었지만/ 개업 축하 시는 / 잘 / 써지지 않고 / 있었다 

몇 번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떠올린 것 같기도 / 했지만 / 옮겨 적기 전에 / 그것은 / 사라지고 없었다 

(…)

그는 결혼식 때 / 친구를 만나기도 했는데 / 그들은 두손을 / 꽉 / 잡고 악수를 나눴지만 / 개업 축하 시에 대한 / 얘기는 / 하지 않았다

(…)

그는 이제 사람 좋은 / 아저씨가 되어 /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 그는 아직 아마추어 시인이고 /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 여전히 없지만 / 시에 대해 / 많은 걸 생각 했고 또 / 많은 걸 /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가 /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 / 때문에 / 얼굴을 감싸고 / 울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 그렇게 하지 / 않는다

대신 / 바람이 부는 저녁 / 벤치에서 / 그는 허공에 던진 / 테니스공을 다시 받으며 / 생각한다 그는

지금 / 완벽한 개업 축하시를 / 떠올렸다고 / 추상적인 / 기쁜 / 반쪽으로 쪼개진 / 흰 / 양파 / 같은 


위의 목표와 다짐들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상상들이 현실에서 발을 뗄 수 있게 만들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살아야 한다고, 이거 다 준비해 놓으려면 적어도 30년은 더 살아야 하고 그쯤 되면 지금 겪는 일들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질 거라고, 음 그러니까 지금은 트라이얼 모드고 나는 너무 어리고 앞으로 더 강한 즐거움과 더 강한 고통이 찾아올 거라고 다독이면 마음이 좀 담담해진다. 그런 마음으로 내일 하루 더 늙어봐야지 하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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