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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16. 2024

배부른 꿈

[나는 하루 더 살아보기로 했다] 서로

열 아홉, 나는 김보람이다. 


그날 있었던 일은 어쩌면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그건 꿈이 아니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진다. 잠에서 깬 순간 본 것. 버스 앞 벽면 시계. 빨간 숫자. 11시 3분? 13분? 심야 버스였고, 차내 등은 모두 꺼져 있었음. 청바지를 입었고, 무릎에 검정 패딩을 덮었음. 옆자리에 앉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다 사타구니 쪽을 더듬는 것을 느낌. 손을 보지는 못함. (…….) 손이 패딩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손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음. 패딩 아래에서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는가? ( …….) 빠져나가는 손의 각도는? (…….) 속도는? (…….) 모든 게 꿈이었나. 너무나도 생생한 꿈. 깨고 나서도 몸에 감각이 남아있어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꿈. 문장이 선명해질수록 기억은 흐릿해 졌고, 기억이 흐릿해질수록 그것이 꿈이었다는 생각은 분명해졌다. 


안OO 시인. 2018년 활동 기록 없음. 


그날 밤 김보람은 김보람의 엄마 옆에서 자겠다고 했다. 김보람의 엄마는 경찰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김보람에게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를 해보자, 고 했다. 김보람은 깜깜한 방에 누워서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몸이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더럽혀진 것 같다. 신고를 하고, 그럼 조사를 받고, 그럼 … 재판을 받게 될까. 그렇게 하면 이 오염감을 말끔히 지울 수 있을까. 김보람은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 내일 아침은 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김보람은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그날 밤 김보람은 푹 잤다. 


사람들은 김보람을 소리 없이 걱정했다.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김보람이 김보람인 것을 몰랐다. 김보람은 힘들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몇 시간 째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해도, 수개월 동안 경찰서와 검찰청을 들락날락 해도 김보람을 둘러싼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김보람에게 큰 위안이었다. 심리치료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정말 괜찮다고.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 빼고) 김보람을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김보람은 두려웠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 되어 버릴까 봐. 시인이 -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 고 나에게 말해준다면. 김보람은 모든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시인은 김보람과 다른 꿈을 꾸었나. 시인은 잠든 김보람을 깨우려고 한 것이지 성추행을 한 것은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왜 시인은 잠든 김보람을 깨워야 했나? 잠든 사람을 깨우는 행위는 성추행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이해할 수 없으므로 김보람은 무사했다. 


살아서 이 버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버스를 나가면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시인과 그의 변호사가 김보람과 그의 부모 앞에 앉았다. 시인의 변호사는 시인 아들의 친구라고 했다. 제가 이 분을 오래 알고 지냈는데, 정말 그런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닌 분에게 김보람은 더듬거리며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울음과 말이 뒤엉켰다. 식도와 기도를 나누는 막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김보람은 진술을 멈출 수 없었다. 늘 해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달 뒤 프린트된 A4용지 두 장이 우편으로 전해져 왔다. 미안하다는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보람은 끝내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했다. 


[ 버스 안 여고생 추행 혐의 유명시인, 검찰서 무혐의 | 중앙일보 | 입력 2018.9.11 12:42 | 이가영 기자 ] 


사람들은 김보람에게 이제는 김보람이 아니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김보람은 6년째 살아있다. 김보람은 죽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죽는 대신 김보람은 상자에서 나왔다. 상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척을 하며 울먹이던 김보람을 기다려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김보람은 기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김보람은 괜찮았으니까. 그래서 김보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김보람은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펴기로 한다. 김보람이 상자 밖에 곧게 선다. 왠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고 나니 비로소, 하나도 괜찮지 않은 김보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괜찮아졌다. 그날 있었던 일이 꿈이었대도 김보람이 김보람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김보람은 이따금씩 김보람들을 만난다. 김보람들의 목소리를 몸으로 듣고, 그들의 실패에 동참한다. 처절하게, 그리고 기쁘게 진다. 


시인은 여전히 시를 쓴다. 그의 시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김보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김보람은 여기에 살아 있다. 당신 앞에, 당당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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