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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16. 2024

물건이 나를 살게 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하루 더 살아보기로 했다] 어진

<소물보: 소중한 물건을 보관해 드립니다> 주인장 김어진 인터뷰


INTERVIEW    


Kim Meow

2023년 4월 6일, 7:00 pm


‘철저한 보관’과는 동떨어지게 생긴 낡고 허름한 종로의 한 골목길에 위치한 곳. 가로세로 길이가 100cm도 넘지 않아 보이는 나무판자에 흰 페인트로 쓰인 “소물보”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실험적이고도 발칙한, 어쩌면 엉뚱한 <소물보: 소중한 물건을 보관해 드립니다>를 운영하는 주인장 어진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본인의 공간을 가지지 못했던 어진은, 자신에게 소중하지만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물건을 보관하지 못했던 기억이 짙게 남아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보통 공간은 사람에게 빌려주기 마련이지만, 어진은 그 사람을 소중히 살게 하는 물건에 자리를 내어준다. 사람 살 곳도 없는 이곳에 물건을 위한 공간이라니.


낡아 보이는 외관과 달리 알차게 제 곳을 메꾸고 있는 소물보 안으로 들어가면 80cm도 안 되는 높이의 카운터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폭탄머리 어진을 만날 수 있다. 매일 기분에 따라 공간의 노래는 바뀌는데 평소에 듣지도 않는 케이팝(K-pop)을 틀기도 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날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흥얼거리는 제이팝(J-pop)을 틀어 놓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소물보는 주인장을 한껏 품은 곳이었다.


어진은 이 공간을 통해 어떤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계속해서 변화하는 공간 규칙처럼, 소물보는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이용자와 물건, 그리고 삶이라는 얽히고설킨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다.


 

Q. 자기소개와 요즘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알려주세요.

어진 안녕하세요. 소물보 주인장 어진입니다. ‘어질게 살다’라는 의미로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요, 잠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크게 바쁘다 할 만한 이슈는 없고요, 소물보 인테리어를 가꾸는 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소물보가 더 괜찮은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은 제 생계와도 관련이 깊으니까요. (웃음) 저 같아도 멋진 곳에 애틋한 물건을 맡기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최근에는 제가 좋아하는 푸릇한 초록 느낌으로 인테리어를 바꾸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힘이 남는다면 수영을 다니고 있습니다. 조금 머쓱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잠깐 배웠던 실력으로 수영장에 다니네요.


Q. 그렇죠 소물보말 그대로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죠이곳을 벌써 10년 동안 운영해 왔는데요실제로 어진이 필요했기에 시작한 공간이라고 들었습니다맞나요?

어진 네 맞아요. 저는 4남매 둘째로 가족이 많은 집에서 자랐어요. 자연스럽게 개인 방을 가지는 것은 어려웠고, 공간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여자인 언니, 여동생과 함께 나누어 쓰는 곳이었죠.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책장을 한 칸씩 분배해 주셨어요. 개개인 방을 주기엔 무리가 있기에 이곳에라도 개인 짐을 보관하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저는 가족들이 오가면서 훤하게 보이는 책장이 싫었어요. 친구와 나눈 편지, 추억을 찍은 사진, 내 마음을 적은 일기장, 부모님께 몰래 드릴 선물 등. 나에게 소중하지만 숨기고 싶은 것들이 다 까발려지는 기분이었죠.


물론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나만의 공간을 갖기는 어렵고, 이는 어떠한 미세하고 예민한 나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 같았어요. 한번은 친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친구가 초등학교 때 독립적인 공간이 없었고, 그때 본인이 가장 의지했던 건 매일 매고 다니는 책가방이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의 부모는 그 가방을 뒤졌고, 친구는 헤집어진 본인의 가방을 발견한 거예요. 많은 상처를 입었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대요. 이때 알게 됐죠. 모두가 동일한 경험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구나 하고요.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침해당하는 기분은 우리를 쉽게 무너뜨려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에 속했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끼고, 이는 정체성과 자아를 소멸시키는 쉽고 간단한 과정이죠. 나는 나에게 소중한 무엇을 가져도 언젠가는 잃게 되는구나, 난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며 살아가는구나.


그래서 번뜩 생각이 들었죠. 물건을 보관한다는 것은 단순히 고가의 물건을 보관하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에요. 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내 자아를 보호하는 일이고, 나에게 소중한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 모두를 추억하고 존중하는 행위일 수 있는 것이죠. 나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말이에요.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서 나처럼 세상에 나만의 공간이 없는 이들에 대해 계속 생각했어요. 저 또한 그러니까요. 공간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에요. 내가 이들을 위해 모든 집을 만들어 줄 수는 없더라도, 작은 물건 공간 정도는 마련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물건 크기가 모두 작지는 않습니다.(웃음)


Q. 소물보의 시작을 들으니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맞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주로 어떤 물건들이 보관되나요?

어진 이용 고객들은 정말 다양해요. 소물보는 나이나 인종, 젠더, 장애유무, 사회적 지위, 교육환경, 외모 등 모두 관계 없이 이 공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곳이거든요. 완벽한 접근성을 갖추지는 못했더라도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유아차를 동반하는 사람도 들어올 수 있도록 경사가 완만한 경사로를 설치했고요, 작은 사람 큰 사람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카운터의 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했어요. 접근성에 있어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으나, 언제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워가는 중이에요. 아무튼 소물보의 규칙을 존중하고, 언제나 괜찮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손님이라면 대환영입니다.


아, 소물보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누군가를 해하는 용도로 사용된(혹은 사용할) 물건은 절대 맡겨질 수 없다는 거예요. 물론 제가 물건의 모든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저는 믿어요. 무엇보다 소물보의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기조는 ‘변화’예요.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사실처럼, 변화가 필요한 규칙이라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성스럽다”와 같은 낡은 단어를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곳이 필요한 누구든지, 언제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조랍니다.


맡겨지는 물건은 다양해요. 집은 작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편지뭉치를 가져오는 사람, 오래전 죽은 반려동물의 용품을 가져오는 사람, 갑작스럽게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되어 물건을 보관하기 곤란한 사람. 혹은 잃어버리면 안 되지만 덜렁거리는 습성 때문에 곧 잃어버릴 것만 같은 작은 메모장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어요. 저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소물보의 중요한 규칙 중 하나인 비밀보장을 위해 더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Q. 소물보는 어진의 여러 고민과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군요그렇다면 소물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어진 무엇보다 안전한 공간 속에서 나의 변화를 마음껏 발휘하는 공간을 마련하자는데 목표를 두고 시작했던 일이라, 물건 보관을 넘어선 일을 해보고 싶어요. 공간과 여러 사회의제를 결합한 세미나를 진행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거꾸로 저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는 것이죠. 실제로 공간은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고 젠더화 되어있거나 자본화, 인종화 등 차별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요. 이는 결국 불평등을 낳고요. 실제로 남성과 여성이 느끼는 공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연구가 많죠. 가사노동, 육아 노동 등 이중 노동의 공간으로서 집에 존재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이 느끼는 집에 대한 감각만 두고 보더라도 공간은 결코 평등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많죠.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언제나 위협을 받는 아이들과 여성이 존재하기도 하고, 내가 어느 부모에게 태어나느냐에 따라 앞으로 살아갈 공간이 있다 없기도 해요.


소물보는 얼핏 보면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만 인식될 수 있지만, 결국엔 각자의 공간이 주는 힘을 믿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곳이라고, 조금은 거창하게 소개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삶이 담겨있고 그 물건으로 내가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면 그 물건은 언제나 소중하게 보관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자기만의 방이 없더라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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