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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Aug 18. 2023

혼자 있기의 중수

어느 날, 거실에 서서 창밖을 보는데 여름의 녹색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창에 바짝 다가서서 공원을 내려다봤다. 집을 구할 때만 해도 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구하고 나니 뷰가 좋은 이 집에서 나는 자주 창에 붙어 고개를 숙인다. 


창에 붙어 설 때면 잊지 않고 공원을 걷는 사람의 수를 센다. 비가 오는 날도, 햇볕이 뜨거운 날도, 밤이 깊어가는 시간에도, 아니면 소파에 앉으려다가 시시때때로 창에 다가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와, 멋있다, 탄성도 지른다. 얼마 전에는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깼다가 거실로 나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산책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새벽 세 시엔 공원을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체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왜 이런 걸 궁금해할까.      


이 집에서의 매일은 공원 산책자를 헤아리는 일과 비슷한 일들로 채워진다. 궁금하면 보거나 읽고, 내가 왜 그걸 궁금해했는지 생각한다. 생각하다 글을 쓰기도 하고, 어느새 잊고는 다른 걸 궁금해한다. 주로 말없이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집은 대체로 조용하다. 윗집 아이가 신이 나기 전까진 몇 시간이고 고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나는 소리라고는 내가 걷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마우스 움직이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냉장고 여는 소리,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뿐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리가 없는 공간. 이 공간에서 나는 소리 없이, 때로는 소리를 내며 활발히 살아가고 있다. 주로 혼자. 그리고 많은 경우 혼자 있는 걸 기뻐하면서.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이십 대에 들어서며 알게 되었다. 사람이 싫거나 그들이 주는 자극에 숨이 막히는 건 아니었지만, 내 정신 상태는 혼자 있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에 좌우되었다. 충분히 혼자 있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만다는 걸 알게 된 후론, 틈만 나면 나를 혼자 두려 애썼다. 하지만 틈이 잘 나지 않아 자주 혼자 있는 시간을 기다리며 허덕이는 입장이 되었다.      


서른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일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힐 땐, 그래서 나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제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혼자 있을 수 있겠단 생각에. 내가 책을 통해 알게 된 작가들은 하나같이 혼자 있기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숲속에 통나무 집을 짓고 들어가 살거나, 사회와 단절된 채 정원을 가꾸며 살았다. 혼자 있기 위해 호텔을 전전하기도 하고, 가족과 살고 있더라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술집에 고정 자리가 있을 정도로 술과 사교를 즐기던 헤밍웨이도 책을 쓸 때면 인터뷰도 거절하며 두문불출했고, J.D. 샐린저 같은 작가는 사람들 앞에 일절 나서지도 않았다. 이런 작가들이 내게 말해주는 바는 이거였다. 글쓰기란 철저히 혼자가 되는 일이라는 것. 그렇다면 나도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두고봐야 알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혼자 있는 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무턱대고 책을 쓰기 시작한 나는 작가들을 열심히 흉내내며 방에 제대로 틀어박혔다. 사람 대신 내 생각과 감정을 붙들고 대화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부모님은 거실에 두고 나는 방에서 생활하며 온종일 읽고 썼다. 읽고 쓰다가 고개를 드니 한 달이 지나 있었고, 또 고개를 드니 세 달이 지나 있었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 만나지 않고 지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괜찮았다. 예상대로, 좋았다.  


혼자 있는 것도 좋고, 혼자 있는 시간에 내가 하는 일도 점점 좋아졌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방에 홀로 앉아 나는 문장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다 고치고 바라보다 고쳤다. 고치면 고칠수록 문장은 나아진다는 걸 배워갔다. 그렇다고 영원히 고치고 있을 수 없기에 적당한 때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배워갔다.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거북목을 한 채 문장을 고치다 보면 글쓰기는 재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좋았다. 


그보다는 누가 누가 오래 참나의 문제였다. 누가 한 번 더 고칠 것이냐, 누가 이 지루한 고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냐, 누가 혼자 있는 고독을 끝내 견뎌낼 것이냐의 문제.      


작가가 되기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 작가가 되기는 비교적 쉬워도 작가로 남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이었다. 작가가 되기도 이토록 어려워 눈물이 나는 마당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 고치면서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긴 퇴고의 과정을 거쳐 겨우 건져낸 문장 하나, 문장 둘, 문장 셋. 하루 종일 앉아 이런 문장을 수 개에서, 수십 개, 수백 개 건져내는 작업이 작가에게 의미를 주어야만, 그래서 내일도 오늘처럼 문장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야만 그 사람은 작가로 남는다. 이런 사람만 작가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작가가 되기는 아득해 보이지만 작가로는 오래 남을 수 있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살았다. 문장을 쌓아 올려 글을 하나 완성하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느끼고 말았으니까. 하루종일 문장을 고민하다가 침대에 누우면 그날 하루가 더없이 의미 있게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문장으로 가득 찬 것이 좋았고, 또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좋았다. 내가 쓴 문장, 내가 쓸 문장, 내가 쓰고 싶은 문장들이 종일 내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이 문장들을 어떻게 좀 하려면 노트북 앞에 혼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말이지 남부럽지 않을 만한 집순이로 거듭났다.      


집순이 정체성으로 살아온지도 십 년이 넘었다. 가족 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경기도 남부 도시에 살게 된 데다 전업 작가 생활로 돌아온 바람에 집순이 정체성은 점차 강화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반했던 작가들처럼 혼자 있기의 고수라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절대 고독 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핏방울을 떨어뜨리듯 문장을 쓰는 작가들과 달리, 나는 절대 고독을 경험해본 적도, 자연과 벗해본 적도, 글을 쓰며 피를 본 적도 없는, 그저 혼자만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은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더라도 혼자 있기의 중수엔 이른 듯하다. 그때그때 꽂히는 것들에 궁금증을 발휘하며 하루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걸 보면.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걸 넘어 재미있게 보내고 있고, 심지어 명랑해지기까지 하는 걸 보면.       


캐럴라인 랩의 <명랑한 은둔자>란 책이 있다. 이 세상 수많은 ‘명랑한 은둔자’들의 자기소개를 대신해 주는 책, 우리는 결코 음울하게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즐겁고 명랑하게 은둔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책에서 랩은 말한다. “은둔하는데 명랑하다고?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불가능해!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쯤에서 우리 명랑한 은둔자들은 손을 번쩍 든다. 여기, 그 개념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여기 있어요!    

  

사회적 관계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나와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 함께 노는 것도 재미있지만 혼자 노는 게 더 재미있어 열심히 혼자 있으려는 사람. 관계에서 모든 의미를 찾는 대신 혼자 무언가를 하고 그 성취를 맛보는 데에서 달콤한 의미를 찾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명랑한 은둔자’는 이런 사람이다. 은둔자라는 말이 너무 어두침침하게 느껴진다면 집순이라 해도 좋다. 나는, 명랑한 집순이. 어쩌면,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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