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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Aug 25. 2023

독립의 즐거움

앞의 글 ‘혼자 있기의 중수’에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집을 구할 때만 해도 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구하고 나니 뷰가 좋은 이 집에서 나는 자주 창에 붙어 고개를 숙인다.” 집을 구한 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은근슬쩍 넘어갔지만, 사실 이건 그냥 ‘집을 구한 게’ 아니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한 것이었다.


독립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 건, 이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여기저기에서 호들갑을 떨긴 뭐하니까 여기에서만 집중적으로 떨기 위해. 그러니 딱 한 번만 독자분들을 향해 크게 외치고 싶다. 여러분, 저 독립했어요! 독립!     


드디어 혼자 살게 되었다. 이십 대 중반부터 바라던 독립이 서른 넘어 시작된 ‘삶을 향한 여정(이제부턴 누가 뭐라 하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며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사실상 기나긴 백수의 삶으로 돌입하게 된 여정)’으로 가로막힌 바람에, 마흔이 넘어서야 수천 권의 인세에 버금가는 월급 수령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삶을 향한 여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뜻밖에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면서 공원 뷰까지 얻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독립을 향한 내 염원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의견이 싹트고 관점이 생기고 주장이 커지던 무렵부터. 아직은 내가 어떤 세계를 원하는지 모르지만 부모님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무렵부터. 그게 무엇이든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들로만 내 세계를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 때부터.


이러한 바람은 형체 없이 내 안에 머물다가 이십 대 중반부터 흐릿하게나마 형체를 보여주었고, 이후 서서히 선명해지다가 삼십 대 후반부터는 윤곽이 뚜렷한 형체로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문 앞에 대쪽같이 서 있는 바람은 성마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묻듯이.      


K-나이별 퀘스트 깨기에 둔감한 편이라, 이 나이엔 이걸 해야 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오진 않았다. 뜨거운 물엔 몸을 담글 엄두를 못 내듯, 나이별 퀘스트 깨기는 내게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주어지는 퀘스트이고, 마지막 퀘스트까지 무사히 깬들 행복할까.


사회가 나이별로 깨라고 제시하는 것들이 깨고자 하는 욕구를 매번 불러오지도 않았다. 남들만큼은 깨야 한다는 생각에 엉뚱한 걸 깨버리면 어쩌나 걱정도 컸다. 애초에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고 깰 필요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힘들여 깰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흔쯤 되면 홀로(독), 서야(립) 한다는 생각은 오래도록 해왔다. 나 혼자만의 퀘스트라고 볼 수 있었다. 마흔쯤 되면 모든 형태의 홀로서기에 익숙해지고, 때론 버겁더라도 감당하고 또 때론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러고 있지 못해 마음에 걸렸다. 부모를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해 나의 여러 부분이 덜 자라게 되었는데, 그 부분들을 명확히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아쉬움이 이것뿐일까. 혼자 살고 싶다는 건 좀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뜻이다. 밤 아홉 시면 잘 준비를 하는 부모와 산다는 건 저녁에 편의점에 가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현관 중문을 여는 순간, 놀란 엄마가 뛰어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왜, 너 어디 가? 무슨 일 있어? 나는 그저 영화를 보다가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을 뿐이고, 귀찮음을 이겨내며 사러 나가려던 것뿐이건만.


나는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며 살고 싶진 않았지만, 이런 순간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맥주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한다면 엄마는 뭐라 할까. 이 ‘야’밤에 무슨 술이냐며 내 등을 방을 향해 떠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디 넣을 데도 없는 건전지 운운하며 집을 나선다. 이런 마흔의 삶. 그 누구도 꿈에 그리지 않던 삶일 것이다. 그래서 난, 수많은 자식이 그러듯, 독립을 꿈꿨다. 밤에 영화를 보다가 맥주가 당길 때 편의점에 가는 일이 누군가의 걱정을 사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드디어 이뤘다. 기쁘게도.     


혼자 살게 되니 예상했듯 나의 덜 자란 부분들이 내 일상에 우수수 떨어졌다. 주로 살림에 관한 것들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부끄럽지만 종량제 봉투도 처음 사봤고, 음식물 쓰레기를 탁월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분리수거 A to Z를 이제야 어설프게나마 마스터했고, 욕실 부문별 청소 방법도 유튜브와 블로그를 오가며 심혈을 기울여 터득했다. 내 방 하나, 내 몸 하나 건사하던 삶에서 더 넓고 많은 것을 건사하는 삶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넘어오고 보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복잡해 보이던 것도 알고 나면 간단한 것들이었다. 건사 방법을 아니 머리가 아닌 몸을 쓰며 차례대로 건사하면 됐다. 어차피 내 일이라 생각하면 크게 귀찮지도 않았다. 택배 박스는 바로바로 정리해서 쌓아놓고, 쓰레기가 나오면 즉시 분리수거 박스에 던져놓고, 빨래는 소량 급속 모드를 이용해 오래 묵히지 않고, 설거지는 하루에 한 번 하고, 물티슈는 한 번 뽑으면 뽕을 뽑는 의미로 이거저거 다 닦고. 이런 식으로 툭툭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집은 깨끗해지고, 냉동고엔 소분한 밥이 삼단으로 쌓였다.      


독립하고 보니 나는 생각보다 더 독립에 적합한 인간이었다. 홀로, 서기에 수반되는 자잘하면서도 필수적인 노동에 물 흐르듯 스며들어 평생을 혼자 살아온 사람처럼 살림을 꾸려가는 걸 보니 그렇다. 살림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일시적인 일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이었다. 살림은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홀로 선 나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탈 없이 적응했다.      


공간을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어 특히 좋다. 혼자 살게 된다면 되도록 집에 뭘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필요한 것만 있고 거추장스러운 건 없는 공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간. 이 공간에 분위기와 낭만 한 스푼 정도만 얹고 싶었다.


책이 있으니 책장이 필요하고, 밥을 먹거나 글을 써야 하니 테이블이 필요하다. 기대어 쉬어야 하니 소파가 필요하고, 잠을 자야 하니 침대가 필요하다. 여기에 아침을 위해 커피 머신을 들이고, 밤을 위해 조명을 놓는다. 필요와 낭만을 위한 물건들만 갖추어 놓기. 꽉 차지 않아 여유로운 공간을 보면 마음도 덩달아 여유로워진다.      


밤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형광등은 끄고 조명으로만 집을 밝힌다.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 조명 아래에서 분위기를 뽐낸다. 조명 빛을 받으며 소파에 앉아 책을 읽어도 좋고,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어제 보다 만 영화를 이어 봐도 좋다.


자기 전까지 두세 시간. 내가 만든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다가 잘 수 있다는 이 소소하면서도 커다란 만족.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움직이다 보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불현듯 벅찬 감정이 몰려온다. 이런 게 행복일까.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나의 시간과 공간이 나의 느슨한 통제하에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독립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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