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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Aug 26. 2019

#3 다시 아르바이트

소설 연재

미니 선풍기로 바람을 쐬며 지나가는 남자를 부러운 듯 바라보면서 민준은 서점을 향해 걸었다. 덥다 못해 뜨거운 태양볕에 머리가 다 얼얼했다. 일 년 전 이맘 때는 이 정도로 덥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민준은 작년 이맘때의 날씨를 기억하려다 이 길을 지나다 우연히 ‘바리스타 구합니다’라고 적힌 공고문을 봤던 순간 역시 기억해냈다.


바리스타 구합니다.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입니다.

급여는 면담하면서 알려드릴게요.

커피를 맛있게 내릴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입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우선 일이 필요했던 터라 민준은 바로 다음 날 서점을 찾아갔다. 하게 될 일이 커피를 내리는 일이든, 물건을 나르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든, 또 햄버거를 만들고 택배를 배달하고 바코드를 찍는 일이든 어차피 민준에게는 아무 상관없었다. 어떤 일이든 그저 돈만 벌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왠지 사람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오후 3시에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상대로 서점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대표로 보이는 여자가 카페 쪽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손바닥만 한 크기의 메모장에 손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민준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눈인사를 했다. 얼굴에 퍼진 자연스러운 미소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편히 구경하세요. 저는 방해하지 않을게요.


대표로 보이는 여자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자 민준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서점을 먼저 둘러보자. 동네 서점이라 하기엔 제법 크기가 컸다. 군데군데 의자도 놓여 있어 눈치 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오른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은 이어지는 벽면의 삼분의 일 지점까지 뻗어 있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그 옆으로는 창문 높이에 맞춰 매대 겸 수납장이 놓여 있었는데, 대충 둘러봐도 딱히 어떤 기준에 따라 책이 진열돼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민준은 바로 앞 매대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메모장이 책갈피처럼 꽂혀있었다. 메모를 읽어봤다.


‘한 사람은 결국 하나의 섬이 아닐까 생각해요. 섬처럼 혼자고, 섬처럼 외롭다고요. 혼자라서, 외로워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도 생각해요. 혼자라서 자유로울 수 있고, 외로워서 깊어질 수 있으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섬처럼 그려진 소설이에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소설은 섬처럼 살고 있던 각각의 인물들이 서로를 발견해 내는 소설이고요. 어, 너 거기 있었니? 응, 난 여기 있었어, 하는 소설들 말이에요. 혼자여서 실은 조금 외로웠는데 이젠 덜 외로워도 될 것 같아, 너 때문에,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이 소설은 저에게 이런 기쁨을 맛보게 해 줬어요.’


민준은 메모장을 원래대로 다시 책에 꽂고 책 제목을 확인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가 우아한 자태로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고슴도치? 혼자? 외로움? 깊이? 혼자라서 자유로울 수 있고, 외로워서 깊어질 수 있다는 말. 민준은 혼자여도 그뿐, 외로워도 그뿐이라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혼자를 피하려는 노력, 외로움을 피하려는 노력은 그래서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히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렇다고 깊어졌나? 잘 모르겠다.


민준은 방금 본 그 메모가 대표처럼 보이는 여자가 테이블에 앉아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걸 다 직접 쓰는 건가. 서점은 책만 진열해놓고 팔면 그만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가 보네.


“저…”


서점을 둘러본 민준은 커피 머신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곤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네,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영주는 글을 쓰다 말고 일어나 민준을 봤다.


“아르바이트 공고 보고 왔어요. 바리스타요.”

“아! 공고!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영주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다는 듯 환한 얼굴로 민준을 맞았다. 그를 자리에 앉히고는 카운터 옆 책상에서 종이 두 장을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영주는 민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 근처에 사세요?”

“네.”

“커피는 내릴 줄 아시고요?”

“네, 커피숍 아르바이트 여러 번 했어요.”

“그럼 저기 저 커피 머신 다룰 수 있겠어요?”


민준이 커피 머신을 슬쩍 돌아봤다.


“아마도요.”

“그럼, 커피 한 번 내려주실래요?”

“지금요?”

“네, 두 잔만 내려줘요. 우리 커피 마시면서 얘기해요.”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영주는 민준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민준은 그런 영주를 바라봤다. 커피를 내리기 전만 해도 민준은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대로 괜찮은 커피 맛을 내는 데에는 늘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준이 내린 커피를 말없이 음미하는 영주를 바라보자 어쩐지 긴장이 됐다. 영주는 천천히 두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민준을 바라봤다.


“왜 안 마셔요? 마셔보세요. 맛있어요.”

“네.”


두 사람은 이십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영주가 말하고, 민준은 들었다. 영주는 커피가 아주 맛있다며 바로 일해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민준은 원래 그러려던 것이기에 그러겠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영주가 말하길, 민준은 이 서점에서 바리스타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했다. 영주가 커피에 관해 신경을 딱 끊을 수 있게만 해달라는 거였다. 원두를 고르고 사는 일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영주는 재차 물었다. 민준은 그게 뭐 어려운 일일까 싶어 이번에도 역시 그러겠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제가 거래하는 로스팅 업체가 있어요. 그곳 대표님이 잘해 줄 거예요.”

“네.”

“각자 자기 일을 잘하면 돼요. 그러다 한쪽이 바쁘다 싶으면 보조로 조금 도와주면 되고요.”

“네.”

“내 쪽에서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니에요. 민준 씨가 바쁘면 저도 도와줄 거예요.”

“네.”


영주는 민준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 내용이 마음에 들면 사인을 하면 된다면서 민준에게 볼펜도 하나 건넸다. 영주는 민준에게 계약서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줬다.


“주 5일 일하는 거예요. 일요일, 월요일을 쉬고요. 오후 12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고요. 괜찮아요?”

“네.”

“서점은 주 6일 열어요. 저는 일요일만 쉬고요.”

“아, 네.”

“초과 근무하게 되면,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지만 초과 근무 수당이 있고요.”

“네.”

“시간당 만 이천 원이고요.”

“만 이천 원이요?”

“주 5일 근무를 하려면 그렇게는 받아야 하겠더라고요.”


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서점을 둘러봤다. 자기가 여기 들어온 이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서점 대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을 처음 고용하는 듯 보이는 이 대표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준은 매우 손쉬운 일을 처리하듯 가뿐히 앉아 있는 영주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보통은 이렇게 많이 안 주세요.”


영주가 고개를 들어 민준을 봤다가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다는 듯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죠. 힘들 거예요. 높은 임대료 때문인 건데… 민준 씨 여긴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여기까지 말하고 영주는 고개를 들어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무심해 보이면서 어딘지 따뜻해 보이기도 하는 눈이었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나로 읽히지 않는 눈빛. 오래도록 알아가며 대화 나누고 싶은 눈빛. 영주는 민준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태도였다. 영주에게 잘 보일 마음이 별로 없다는 태도. 그러면서도 예의가 배어있는 태도.   


“일하려면 충분히 쉬어야 하고, 쉬더라도 돈은 일정 금액 이상은 받아야 생활이 가능하잖아요.”


영주의 말을 듣고 민준은 계약서를 다시 읽어봤다. 그러니까 이 대표는 알바생이 충분히 쉬며 일할 수 있게끔 주 5일, 하루 8시간을 먼저 생각해 놓은 후에 알바생이 일정 금액을 받게 하려고 시간당 만 이천 원으로 알바비를 정했다는 말이었다. 초보 대표의 정의일까, 아니면 이 서점이 보기보다는 꽤 수입이 좋은 걸까. 민준은 영주가 사인을 하라고 해서 했다. 영주도 사인을 했다. 그가 계약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영주에게 묵례를 하는 민준에게 영주가 말했다.


“그런데 이 서점 2년밖에 못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요즘 누가 아르바이트를 2년 이상 한단 말인가. 민준이 지금껏 가장 길게 일했던 아르바이트는 6개월이었다. 민준 입장에서는 영주가 다음 달에 갑자기 일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해도 별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간단히 “네.”라고 대답했다.


영주라는 사람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네.”라고 대답한 게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지난 일 년간 영주와 민준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영주는 새롭게 일을 꾸미면서 손님들 반응을 살피는 재미에 빠진 듯했고, 민준은 묵묵히 원두를 고르고, 사고, 커피를 내렸다. 확실히 영주는 커피 맛만 좋으면 민준에겐 더 바랄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 민준을 보며 얼굴 표정이 웃기다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보통 이럴 땐 눈치를 줘야 하는 건데... 하고 생각하며 민준도 따라 피식 웃곤 했다.


민준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저 왔습니다.”


민준이 책을 읽고 있던 영주에게 인사했다.


“어, 왔어요? 오늘 너무 덥죠?”

"그러네요."


민준은 바 모양인 테이블을 위로 올려 그의 자리로 들어섰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민준의 자리, 다른 쪽은 영주의 자리였다.  


“오늘 커피는 무슨 맛이에요?”


영주가 손을 닦고 있는 민준에게 묻자 민준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따가 맞춰보세요.”


영주가 읽고 있는 책 옆에 어느새 커피 한 잔이 놓였다. 민준은 그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은 뒤 영주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봤다. 영주가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어제랑 비슷한데, 과일향이 조금 더 강한 것 같아요.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민준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익숙하게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서점 문을 열기 전까지 영주는 책을 읽을 것이고, 민준은 오늘 쓸 원두를 준비하며 틈틈이 서점 여기저기를 청소할 것이다. 어젯밤에 영주가 정리해 놓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민준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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