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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가체프 Sep 26. 2024

처음이자, 마지막 전교 1등

보물상자 정리


책장의 책을 비우다 말고, 책장 맨 아래 칸 서랍을 열었다.


'아! 이 보물상자들 어쩌냐...'


외면하고 싶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바로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뭐든 모으기 좋아했던 아이.


저녁 시간 대 tv 만화를 중학교 때 까지 다 섭렵했던 아이.

친구들은 그 시간에 학원을 가기에 친구들을 위해

녹화까지 했던 아이.


(매일 같은 시간 만화 주제가를 듣고 따라 부르다 보니,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크박스같이

만화 주제가 30곡 정도는 거뜬히 부를 수 있다는 건

가족만 아는 비밀인데 오늘 이렇게 공개도 해 본다.)




틴 케이스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돌멩이, 조개 껍데기, 친구들 쪽지, 머리핀, 과자 봉지 오린 것 등은 과감히 비워버리고, 추억의 만화 카드는 챙겨두었다.



12 간지 순서 외우는 데는 '꾸러기수비대' 노래만 한 게 없어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 몇 번 불러줬다.

만화를 보지 않은 아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고 영 외우기가 신통치 않더니, 어느새 재미 들려서 잘도 부른다.





중학교 때까지 색칠공부 하고 논 것도,

이걸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도 참 신기할 따름이다.





사춘기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고2 병이 확실히 걸렸던 거 같다.

지금도 가끔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긴 한데

왜 이렇게 웃긴 걸까?



어찌 보면 나는 그 시기뿐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사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돼서

"여보, 나 산후우울증인 거 같아. 어떡해." 했더니,

신랑이 "너는 항상 감정의 폭이 크잖아. 그리고 회복도 빠르고." 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던  떠오른다.


'산후우울증'의 심각성을 몰라주는 신랑에게 너무 화가 났다가 또 나를 너무 잘 아는 신랑에게 놀라기도 하며 죽지 않고 더 잘 살아서 꼭 이 자식에게 복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다. 열받아서 잠시 우울증이 날아간 셈이다.






남동생의 귀여운 편지도 발견했다. 남동생에게는 사진으로 먼저 보내주고, 추석 연휴 때 부모님께 전해드렸다.


내 가족도 사랑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원가족 ♡






이렇게 못 쓴 글인데 최우수라니, 중학교 1학년 때 쓴 독후감을 발견하고 놀랐지만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반 인원 45명, 전교 인원 675명 중에

내가 전교 1등이라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에 친 학력성취도 평가인데 국어 과목만 그렇다.

그리고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전교 1등이었다.



과거의 영광일 뿐인 이 사실 하나가,

40대 아줌마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아! 나는 이런 아이였지. 지금도 그런 걸 좋아하지.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사춘기 아니고 벌써 갱년기가 오려는 건가.



눈물 닦고 어여 마저 정리해야지.

나에게는 보물상자가 너무도 많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재능도...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을 필요 없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직조되는 게 인생이니까요. 꿈과 희망의 여지를 남겨 둘 줄 알아야 합니다.

_박웅현 <여덟 단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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