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7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아노라>, 무너져버린 꿈 앞의 두 사람 그리고 '눈'

부질없는 노력, 미국 없는 아메리칸 드림, 변한 것 없는 그녀의 삶

by 헤이설 Mar 03. 2025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노라>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었네요! 감독상과 각본상에 더해 저로서는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가 받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던 여우주연상까지 마이키 매디슨이 차지했습니다. <아노라>는 분명 작년 한국에서 개봉했던 작품들 중 손에 꼽을 만큼 탁월했으니 경우에 따라 다른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수는 있겠으나 이 결과에 흠을 잡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던 작품이 <마티> 이후 <기생충>까지 55년이나 걸렸는데 불과 5년 만에 <아노라>가 그 흔치 않은 영광을 또 한 번 성취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아도 <아노라>에 대해서는 꼭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 싶었는데 지금과 같은 적기는 또 없겠군요.


이제 와서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션 베이커의 전작들과 비교되는 플롯의 특성(인디영화적인 전작들 대 보다 주류적인 <아노라>)이나 <퍼펙트 케어>를 연상시키는 1막에서 2막으로의 아쉬운 연결 등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듯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말 안 하고 넘어가기엔 아쉬우니 토로스가 아기 세례식에서 문자를 보고는 "안 돼."라고 나지막이 내뱉는 순간은 특히 배우의 톤 때문에 '개웃긴 쇼트'라고 메모해두었을 정도로 웃겼다는 것쯤은 덧붙여도 괜찮겠죠. 혹은 다이아몬드와 싸운 뒤 뺨에 난 상처로 애니의 내면을 외화하고, 동시에 토로스가 프레임 바깥에서 이반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으로서 애니의 감정을 대신 짐작하게 만드는 연출과 각본에 감탄하고 넘어가도요. 이외에도 소소하게 좋았던 지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바로 핵심을 향해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노라>에 대한 이야기는 엔딩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노라>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제치고 션 베이커의 최고작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노라>의 엔딩은 션 베이커의 작품들 중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유명한 엔딩에 대해 항상 아쉬움을 느껴왔던 입장으로서 저는 <아노라>의 마지막 쇼트에 훨씬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4개월 전 이 영화를 본 직후에는 '그렇다고 유달리 엔딩이 압도적인 작품들의 목록에 이 영화를 넣지는 않을 것 같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여두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음악도 없고 차 바깥도 적막한 상황에서, 애니의 울음을 마지막으로 암전이 된 후 차 엔진 소리와 와이퍼 소리만 남은 <아노라>의 엔딩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처연하고 슬프면서, 영화가 끝난 후 애니가 살아가야 할 삶을 생각하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게 만듭니다. 작년 개봉작들 중 이만큼 인상적인 라스트 쇼트를 가진 작품은 <메이 디셈버>뿐인 듯합니다. <아노라>만큼 좋았던 <룸 넥스트 도어>의 엔딩에도 내리는 눈이 등장하지만, 엔딩에 한해서만큼은 <아노라>의 완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엔딩에는 사실상 영화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노라>의 마무리가 탁월한 것은 감정적으로 관객을 무너뜨리거나 135분 간의 떠들썩한 이야기에 정확한 구두점을 내리찍어서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핵심들이 여기에 배치된 인물이나 그들이 놓인 공간, 그들이 하는 행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엔딩과 얽힌 요소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로, 애니는 끝끝내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애니의 신분상승은 전적으로 행운, 즉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녀가 이반의 테이블로 보내진 것은 그녀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지미가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애니는 아예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나마 조금 말을 할 수 있을 뿐이었고, 그 정도의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것조차 본인이 배우려고 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덧붙여 이때 애니는 분장실에서 식사 중인지라 손님을 받으러 나가기 싫다고 했지만 지미가 억지로 내보낸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반의 테이블로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이반에 의해서입니다. 이 모든 우연적이고 무의지적인 요소는 결국 이 행운을 그녀가 성취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 빼앗길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를 드리웁니다.


하지만 행운과도 같은 만남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그녀는 노력으로 반응합니다. 애니의 노력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반부의 난장판에서 이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분투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스토리텔링이 갖춰야 할 교과서적인 측면, 즉 주인공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한 기술적 요소이자 능동적인 주인공으로서 애니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영속시킬 자격이 있는지를 가름하는 시험대이기 때문입니다. 애니(와 션 베이커)는 이 부분을 가능한 한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부모님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외에는 결혼에 아무런 뜻도 없었던 한낱 애새끼이고(술에 절은 이반에게 애니는 "이 사람들 말 들을 필요 없어. 넌 성인이잖아."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애니의 착각 혹은 간절한 소망일 뿐입니다), 애니에 대한 갈리나 자카로바의 적대감은 너무나 강경하기 때문에 애니는 분투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지독할 정도로 높고 단단한 현실의 벽 때문일 거예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애니가 했던 또다른 노력은 바로 섹스입니다. <아노라>의 1막이 미학적으로 훌륭하게 다가왔던 것은 애니의 성공가도를 아찔하게 묘사하는 여러 몽타주 시퀀스에 반드시 이반과의 섹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기념하는 파티가 파하자마자 두 사람은 방에서 섹스를 하고, 애니가 룸메이트와 살던 허름한 집을 떠나마자 이어지는 장면도 섹스씬입니다. 이반의 친구들과 파티를 하고 클럽에 놀러다니는 짧은 시퀀스에는 두 사람이 섹스하는 쇼트만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쇼트들은 (애니는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계약 연애의 성격이 무엇인지 명확히 주지시키죠. 사실 애니가 이반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이미 그는 자신의 목적을 대놓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때는 물론 서비스의 차원에서 물은 것이지만) "What are you looking for?"이라는 애니의 질문에 이반은 "Sex."라고 간결하게 답했죠. 이반이 이후 애니를 돕기 위해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은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섹스로 점철된 것은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묘사하는 장면에는 오프닝에도 나왔던 밝고 신나는 노래 'Greatest Day'(!)가 깔려 있는데, 이 충동적인 결혼을 달콤한 맛으로 포장하는 것 자체도 상징적이지만 무엇보다 스트립 댄스 장면과 결혼 장면을 동일한 음악으로 연결해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게다가 애니가 클럽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는 곡이 중간에 확 끊기면서 연출의 의도가 드러나고요. 애니가 클럽에서 퇴장한 다음 다시 음악이 재개되며 두 사람이 반지와 코트를 쇼핑하고 집을 꾸미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다음에는 방 안에서 하는 섹스와 석양을 배경으로 발코니에서 하는 섹스가 연달아 붙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섹스는 애니가 이반으로부터 뚝 떨어진 행운을 잡을 수 있게 해준 최초의 열쇠이자(VIP룸에서 애니는 룰을 깨고 이반에게 매춘에 대한 신호를 보냅니다) 이반과의 관계를 그나마 지탱시킬 수 있는 연료입니다. 그리고 미학적으로 보자면 반복해서 삽입되는 섹스 장면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를 관객에게 계속 상기시키는 장치입니다.


섹스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대목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이반이 계속 급하게 삽입을 하자 애니가 "템포를 낮춰야 더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어."라고 조언해주는 순간입니다. 이 상황은 이 관계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 하는 애니와 쾌락만 강렬하다면 지속시간 따위는 개의치 않는 이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후에 나오는 섹스 장면들을 보면 이반은 애니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의 즐거움은 애니의 바람과는 반대로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죠.


애니가 탈출하고 싶었던 삶의 한 구석에는 성노동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엔딩에서 이고르에게, 마치 습관이 돼버린 행동인 양 육체적으로 다가가다가, 멈춰서 상대를 비난하듯 때리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은 그녀가 탈출했다고 생각했던 삶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을 거고요. 이반은 내내 자신이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이 불행인 듯 표현하지만, 정작 그가 애니와 헤어질 때 건네는 말은 "내 마지막 미국 여행을 재밌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였습니다. 그는 러시아로 잡혀가는 것이지만 뒤집어서 보면 미국을 떠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니는 미국을, 이곳에서의 스트립 댄서로서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끝까지 이고르에게 모진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애니는 어쨌든 자신이 그에게 입은 호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섹스뿐이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이고르를 때리는 것은 사실은 이반을 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텐데, 이것이 결국 실제 가해자에게 닿지 못하고 엄한(그리고 애니와 똑같이 이민자 하류층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은 씁쓸한 아이러니입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아노라>는 <블루 재스민>이나 <프란시스 하>처럼 인물의 이름과 제목을 흥미롭게 엮어서 다룬 또 하나의 예시입니다. 애니는 오프닝부터 자기를 애니라고 소개하면서 호객행위를 하고 다니지만 이후 그녀의 본명은 아노라임이 드러납니다. 한편 그녀가 토로스에게 자신의 이름은 아노라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장면은 두 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 "다들 애니라고 불러."라고 했던 대사는"It's not Anora. It's Ani."라고 더 강하게 주장하는 대사로 격앙되죠. 왜 그녀의 이름과 관련된 설정은 중요할까요? 굳이 말하자면 애니가 자신의 본명을 부정하고 애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장하는 것은 <블루 재스민>에서 재닛이 재스민으로, <TAR 타르>에서 린다가 리디아로 개칭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애니는 자신의 우즈베키스탄계 출생을 드러내는 이름을 거부하고 미국식으로 살짝 바꾼 이름을 고집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아노라'이고, 이고르는 그녀에게 '애니'보다 '아노라'가 더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녀가 '애니'라는 이름을 통해 (미국에서) 성취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해 그녀 고유의 것들, 혹은 그녀 태생 고유의 것들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애니는 자신의 원명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고르가 찾아봐준 덕분에 '석류'와 '빛', 그리고 '밝다'라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곧 국적과도 연결됩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과 미국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여정을 다루는 이 영화의 주요인물들 중 미국인은 없습니다(스트립 클럽의 매니저가 대표적인 영어식 이름인 '지미'로 불린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우즈베키스탄계인 애니와 아르메니아인들인 토로스, 가닉과 이고르, 그리고 부유한 러시아인들이 미국에서의 삶을 두고 한바탕 싸웁니다. 이 영화가 굳이 어마어마한 재력가를 미국인이 아닌 러시아인으로 설정한 것 또한 흥미로운데, 이들이 결국 러시아로 돌아감으로 인해서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공간으로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카로프 가족은 아메리칸 드림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의 부는 러시아에서 이룬 것이고, 여전히 그들의 터전은 러시아입니다. 즉,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이나 아르메니아에서 넘어온 이들과 달리 이반에게 미국은 그저 '여행지'일 뿐입니다(다시 한 번, "내 마지막 미국 여행을 재밌게 만들어줘서 고마워."를 기억해둡시다). 그리고 미국은 베가스 카지노의 지배인이 보여주듯 돈을 통크게 쓰는 사람이라면 러시아인이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심지어 모욕까지 감내하며 환영하는 곳이죠. 이 영화 속의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롭습니다. 애니가 기꺼이 자카로프 가문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은 계급이동을 원하는 사람들의 방관자이기도 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God bless America!"라고 외친 인물은 애니에게 매춘의 신호를 받고 있던 이반 단 한 명이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1막의 편집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탁월한 지점이 섹스의 반복적인 삽입이었다면, 2막부터 특히 뒤로 갈수록 인상적인 것은 장면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이고르를 관객이 계속 의식하게끔 만드는 쇼트들입니다. 이반과 가닉이 결혼증명서를 찾으러 2층으로 가 있는 사이 1층에서 소파의 끝과 끝에 어색하게 앉은 애니와 이고르를 잡은 롱쇼트와 그들의 어색한 대화가 함께 나오는 것을 봤을 때부터 왜 이 캐릭터를 이렇게 묘사해야 하는지 궁금함이 생기죠. 이때까지만 해도 일종의 유머로 사용된 건가, 싶었지만 이후 영화는 이고르가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타이밍에 그의 쇼트를 굉장히 많이 삽입함으로써 그의 중요성을 후반부에 들어서기 전부터 강조합니다.


이고르의 쇼트가 본격적으로 적극 삽입되는 것은 애니가 이반의 부모를 만났을 때부터입니다. 자동차 가운데 자리에 타 있는 이반에게 애니가 이혼하지 말자고 문 밖에서 어르고 달래는 동안 문 쪽에 앉아 있는 이고르는 어느 캐릭터의 쇼트로 넘어가더라도 프레임의 가운데에 멀뚱히 끼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니가 갈리나 자카로바에게 "이 가문의 일원이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요."라고 말할 때는 이고르의 반응쇼트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애니와 이반이 터덜터덜 비행기로 걸어가는 투샷의 후경에서도 이고르가 걸어오고 있고, 이반이 무책임하게 "내가 무슨 말을 하길 원하는데?"라 말하고 나서 나오는 애니의 반응쇼트에도 이고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애니를 이고르가 바라본 직후 쇼트에서는 마치 그의 시점쇼트처럼 애니가 포착됩니다. 쇼트의 끝부분에 다소 객관적인 패닝이 있기 때문에 이 쇼트를 백퍼센트 이고르의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관객이 부분적으로 이고르의 시점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죠.


이 영화는 전적으로 애니의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이고르가 애니를 '바라보는' 쇼트들이 있다는 것은 이고르의 시점에 따라 애니가 겪는 사건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고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바비와 유사한 캐릭터로 보입니다. 바비가 선의와 존중, 그리고 연민을 가지고 모텔촌의 사람들을 대하지만 마지막에는 무니와 핼리의 비극에 개입하지 못하고 그저 안타까워 할 뿐이었던 캐릭터였던 것처럼 이고르는 애니를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는, 그러나 끝끝내 무너지는 그녀를 그저 토닥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바비와 이고르 두 캐릭터를 감독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 또는 관객을 위해 예비된 자리로 보는 것 또한 타당할 겁니다.


이반의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이고르가 "너 그 집안 식구 안 되길 잘한 거야."라고 말을 건네자 애니는 "내가 네 망할 의견 물어봤어?"라고 받아치고(이 순간 애니의 머릿속에는 날아가버린 신분상승의 꿈과 토로스와 갈리나 자카로바로부터 수 차례 들은 '창녀'라는 말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자기가 옳은 결정을 했다는 위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고르는 이에 대해 "I just try to support you."라고 답합니다. 애니는 "넌 나한테 폭력을 가했어."라고 어처구니없어 하지만, 온갖 가구들이 박살나고 애니가 다치기까지 한 슬랩스틱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고르는 애니를 선의로 대한 것입니다. 즉, 낮에 그가 애니에게 했던 행동은 폭력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치지 않게 진정시킨 것이며, 멍이 든 건 그녀의 피부가 너무 약해서일 뿐이라는 거죠. 이 사안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은 극단적으로 갈려 있고 사실 관객이 어느 한쪽 편을 들 필요는 없지만, 다만 중요한 것은 이고르가 애니를 토로스나 가닉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고르는 차에서 내리려는 애니를 불러 토로스가 빼앗았던 결혼 반지를 돌려줍니다. 여기서 이고르가 반지를 꺼내기 직전 두 사람의 정면 클로즈업이 번갈아 나오죠. 인물이 카메라와 눈을 맞추듯이 촬영된 앵글은 영화에서 이 장면이 유일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시선을 관객이 체현할 수 있는 것은 육체적 사랑과 반짝거리는 희망에 젖은 연인들의 눈빛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실패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유사한 처지의 두 사람이 교환하는 시선뿐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불가해하면서도 뇌리에 깊숙이 박힌 대사는 애니가 이고르에게 했던 "넌 강간범의 눈을 가졌거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우선, 다시 한 번 애니는 자신이 이반에게 내쏘고 싶었던 바를 엉뚱한 이고르에게 저격합니다. 이반에 의해 희망이 유린당한 지금, 그와 나눴던 섹스들은 그녀에게 더 이상 '섹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고르의 '시선'을 그녀가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후반부 이고르의 쇼트들은 애니와 자카로프 가족 간의 소동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 목격자, 심하게 말하면 방관자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가 내내 자기 옆에서 자신의 발버둥과 전락을 보아왔다는 사실이 애니로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말한 것처럼 이고르와 관객이 부분적으로나마 맞물려 있다면, '강간범의 눈을 가졌'다는 비난은 관객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테고요. 이 영화가 이고르나 관객을 매섭게 비난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목격자나 방관자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의 자리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이 영화의 엔딩이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은 이고르와 마찬가지로 관객 또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겠죠.

브런치 글 이미지 4

애니와 이고르는 '할머니'라는 모티브로 엮여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애니가 러시아어를 배운 것 자체가 할머니와의 소통을 위해서였죠. 이고르는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고,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차 역시 할머니의 차입니다. 즉, 이고르의 삶의 터전은 할머니에게 붙박여 있습니다. 할머니의 집과 차가 없었다면 그는 지금의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고르는 이것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태생을 지우고 미국식 삶을 살아가려는 애니와 달리 이고르는 자신의 뿌리와 계속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This car is very you."라고 애니는 말하는데, 이고르가 "Do you like it?"이라고 묻자 애니는 단칼에 아니라고 쏘아붙입니다. 애니는 본능적으로 미국 바깥의 뿌리와 연결된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엔딩이라는 이 특정한 순간을 놓고 보든, 영화의 사건 전체를 놓고 보든 둘 중 덜 비참한 사람은 애니가 아니라 이고르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미국에서 펼쳐지는 동시에 이고르 할머니의 차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기도 합니다(이 비좁은 차 안은 파티 장면에서 짧게 스쳐지나갔던 커다란 리무진과 대비됩니다). 애니가 꿈꿨던 것, 벗어나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 공간적 세팅은 작품을 마무리하는 거의 최상의 설정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아노라>가 단순히 애니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다이아몬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애니가 결혼 선물로 받은 반지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이 흥미로운 캐릭터는 오프닝에서부터 애니가 자신의 주 고객에게 춤을 춰주었다고 격분해서 따지고 욕을 하며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클럽 고객으로 비유되는 '파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편 애니가 결혼하며 클럽을 그만둘 때는 길어야 2주밖에 못 갈 거라고 악담을 퍼붓던 다이아몬드 또한 이반이 클럽에 오자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나섭니다. 여기서는 이반이 애니와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에 두고 싸우는 파이인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이아몬드는 같은 파이를 두고 싸우는 '아메리칸 드리머'들이 얼마나 절실하고도 허황된 꿈을 꾸는지 드러내는 캐릭터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그 파이를 획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스트립 댄서이자 매춘부인 여성을 주인공 삼아 그녀의 짧은 흥망성쇠를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시키고 연민과 온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애니의 직업과 꿈을 비난하고 그녀의 최후를 당연하다는 식으로 매도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쉽고도 폭력적인 시각과 거리가 멉니다(물론 애니는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게 가볍게 비웃거나 깔아뭉개고 넘어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게다가 션 베이커에게는 <귀여운 여인>처럼 판타지를 앞세우고 현실을 왜곡하며 따라서 위험한 결론으로 이끌리는 부주의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무력한 관객의 자리'를 마련해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노라>는 아카데미 작품상의 다른 유력한 후보였던 <브루탈리스트>와 주제적으로 많은 부분이 겹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은 돈에 유린되고 새 삶에 대한 희망을 짓밟히며,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미국은 매서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내지만 둘을 함께 보고 엮어서 생각해보는 것도 무척 유의미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저는 두 작품 모두 거의 비슷하게 좋았는데, 다만 <브루탈리스트>의 경우 영화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처음 볼 때 정보량과 구조에 압도돼서 영화를 감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거의 모든 면에서 <아노라>의 날이니, <브루탈리스트>에 대해서는 내일까지 생각을 잠시 멈추어도 괜찮겠군요.

작가의 이전글 <레드 룸스>, 다크웹보다 어두운 그 내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