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이후 열심히 살고 싶었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과목들을 수강하고 스펙을 위해 독서 동아리, 데이터 분석 학회에 들어갔다. 더불어 일주일에 5일, 매일 2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병행했다. 생활비는 직접 벌고 싶어 아르바이트와 대학교 근로 장학생으로 일도 했다. 흔히 말하는 ‘갓생’을 살고 싶었다.
이렇게 딱 한 달을 살았을 때였다. 마침 대학교 가을 축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지겹던 더위가 물러가고 놀러 가기 좋은 9월이었다. 대학교 근로가 끝나고 건물을 나섰다. 하늘은 붉은 빛깔로 가득 차있었다. 띄엄띄엄 있던 뭉게구름들은 붉은 노을빛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유독 좋은 날이었다. 멀리서는 래퍼 쌈디의 노래와 찢어질 것 같은 함성들이 함께 들려왔다. 힘찬 소리의 반대편으로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오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나는 알바를 하러 가야 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의 인파 속을 강물 역행하듯이 헤쳐 나갔다. 나를 지나치던 사람들의 표정은 맑은 물처럼 설레고 즐거워 보였다. 갑자기 보이지 않은 공허함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왔다.
갑작스러웠다.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 단지 축제를 즐기지 못해서 찾아온 공허는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그저 고통스러웠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외로움만이 나를 감싸주었다.
‘이 공허함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마침 시험기간이라 거의 온종일 집에 있을 수 있었다. 작은 방, 책상 위의 작은 스탠드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며 고민했다. 왜 사람들이 힘들면 술과 담배를 찾는지 알았다. 하지만 난 그 기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마음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세상이 정해준 틀엔 부합할지 몰라도, 그게 과연 진정한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위한 공부일까?’
이 말을 해준 친구의 행보가 항상 부러웠다. 자신이 현재 걷고 있는 길은 사회가 정해준 길이라며 휴학하고 음악의 길을 걷고 있던 친구였다. 집안 사정이 썩 좋지 않아 카페와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레슨, 연습실, 등의 비용들과 생활비를 모두 혼자 충당했다. 일체의 용돈을 받지 않았다. 매일매일 힘들다고 하였지만 정작 음악을 할 때면 활기차 보였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힘든 삶을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낭만적이었다.
이 친구가 부러웠던 이유는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낭만을 찾을 수 없던 길이었다. 친구의 말과 삶을 통해 깨달았다.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지쳤던 것이다. 세상이 정해준 길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원래 관심이 있던 분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행동으로 옮겼다. 버킷리스트이며 나의 꿈인 해외봉사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 '캠퍼스픽'에서 봤던 1년 간 진행되는 Koica-NGO 봉사단을 기억해냈고 고민 없이 지원했다. 솔직히 안 될 줄 알았다. 대부분 직장인들로 구성된다고 들었으며, 갓 전역한 나에게는 스펙이라고는 대학교 봉사단체 총무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서류 합격, 면접 합격, 신체검사 합격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은 점점 설레고 미치는 것 같았다. 떨어지는 것을 예상했던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이었다. 나의 이런 상황을 모르던 지인들은 내가 미친 것 같다고 하였다.
최종적으로 방글라데시에 가게 되겠다는 합격 메일을 받았다. 대학교 근로를 하고 있던 나는 마스크 사이로 웃음이 실실 삐져나왔다. 이렇게 방글라데시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