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손상기 화백에 대해

손상기의 삶과 예술

by 에밀리

이 세상은 한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곳일까?


내게 있어선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세상에 나가서는 정말 열심히 산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은 품어본 적도 없는 사람마냥 아주 열심을 다한다. 그렇지만 단 한순간도 이 질문이 내 가슴속에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 이런 생각이 아주 적절한 비율의 확신으로 채워지면 내 손으로 이 삶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이중생활을 살아가다가 요근래에는 유독 가슴 아픈 소식들에 눈이 뜨이게 되었다. 정확히 어떤 것이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남의 아픔이 언제부턴가 아주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엔 내 눈물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눈물이 있었다.


나의 아픔밖에 모르고 나의 안위가 제일 중요한 이기성에서 잠시 벗어나 동정이든 공감이든 누군가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참 이상하게 많은 것이 아무렇지 않아져 있기도 한다. 물론 남의 얘기가 들릴 때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손상기 화백은 내게 남의 얘기가 도저히 잘 들리지 않던 시기에 처음 알게 되었다. 어딘가 모르게 거침이 없고 무언가를 지속해서 호소하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3세부터 구루병을 앓아 척추만곡이라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산 손상기 화백에게는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가 그린 '영원한 퇴원'이라는 작품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지긋지긋하게 병원을 들낙거려여만했던 그의 운명이 담겨 있는 그림이었다. 빈 병원 침대에는 갈색 때탄 지팡이만이 우두커니 놓여있다. 누군가 살다 간 삶의 뒷모습이다. 결코 아름답기만 하다고 말할 수 없을만큼 산 사람들에게는 극도의 허망함을 주는 그림이다. 아무리 밝고, 화려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기에. 그렇지만 너무 많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찾아온 죽음은 허망함 뿐 아니라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위안과 안식의 의미도 내포한다고 느낀다.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힘이 들때마다 꺼내보게 되는 작품은 '아빠와 딸'이라는 작품이다.


어두운 형체를 입은 아빠는 딸과 두 손을 붙잡고 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작품 속 어디에도 이렇다할 색채가 쓰인 곳은 없어 딸의 파란색 치마가 유독 눈에 띤다. 딸은 아빠의 팔에 의지하여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부모와의 관계는 힘들다. 어렵고, 무섭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시절은 차라리 부모의 결점을 볼 수 없었기에 행복한 의존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안 지금, 부모도 그저 나약하고 자신을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 의존은 내게 너무나도 어려운 단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너무 외롭고 아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또 아름답다. 이렇다 할 내용도, 정확히 알 수 있는 표정이나 행동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한번도 다쳐본 적 없는 꼿꼿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비맞고, 상처입고, 깨지고 피흘렸지만 그것들을 이겨냈기에 회복의 기쁨을 아는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서는 그저 모사된 수준이겠지만 언젠가는 완전히 회복될 그 관계를 기대한다. 어떤 소유물로도 채울 수 없는 완전한 충족감은 관계에서 오는 것일 테니까.


손상기 화백의 대학시절 은사에게 자신이 아닌 사회의 다른 불행한 이들을 바라보도록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안에는 이 세상에 소외된 장면들이 많이 담겨있다. 그의 인생이 개인적으로 너무 많은 고통으로 얼룩졌었지만 그의 의식이 결코 자기 자신안에만 매몰되고 경화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멋있는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눈물을 내 스스로 닦고 치유하는 일이 어디까지 의미있는 일일까. 아직도 많이 쓰라리고 아프긴 하지만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 더 아파하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된다면 나의 남은 회복이 그때부터 시작되리라 믿는다.

keyword
이전 13화싫증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