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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증에 대해

by 에밀리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느날 문득 정말 뜬금없는 순간에 어떤 노래 하나를 귀에 들리는 때가 있다. 정말 불현듯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 노래가 이렇게 좋았었나?’ 싶은 것이다. 그때가 바로 그 음악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이래도 저래도 별 감흥이 없다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가,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이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그 노래만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있곤 한다. 그렇다면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제 그 순간부터는 이 노래쯤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알고지낸지는 꽤 오래되었어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하고 마음이 열리는 건 한순간이다. 마음이 열린 틈을 타서 그 사람이 들어오고 나면 이제 문제의 시작이다. 그 사람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때로는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가 없다. 주위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다친다해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이지만 내 곁에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아프다면 내가 아픈것마냥 때론 그것보다 더많이 아프게 된다. 더 잘나고 더 멋진 사람 몇트럭으로도 이제 그 한사람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첫눈의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아무리 들어도 안질릴 것 같고 평생 이 노래만 듣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고까지 함부로 단정짓곤 했었다. 하지만 너무 좋은 노래가 있다해도 그것만 평생 들으면서 살라고 한다면 그 노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노래가 될지도 모른다. 굳이 그렇게 누가 고문하지 않더라도 사랑의 유통기한은 어차피 그리 길지 않다. 길어야 한달 짧으면 수일내에 이내 노래도 싫증이 나버리고 만다. 이번은 다를 것 같다가도 어김없이 싫증이 나버리고 나면 내가 왠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관계도 똑같다. 게다가 사람은 노래보다 더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 저 사람이 없으면 안될 것 같고, 괜히 쓸데없이 그 사람과의 미래를 그려보게 되다가도 거짓말처럼 빠른시일안에 서로에게 서로가 별 볼일없어져 그냥 서로를 스쳐지나가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가끔은 우리의 감정을 그렇게도 별볼일없는 걸로 만들어놓고는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싫증이 나면 다시 내 플레이리스트를 채워주는 건 이제껏 들어왔던 좋은 노래들이다. 분명 그 노래들도 과거 어느순간 나에게 들어왔던 노래들일 것이다. 지금은 번개같던 그 순간을 잊었지만 그 노래와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들, 함께 땀도 흘리고 눈물도 흘리고, 함께 봄도 지내고 겨울도 지내고, 함께 꽃도 보고 눈도 보았던 시간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맺힌 기억들이 가끔은 멈춰있던 나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관계에 대한 권태는 노래에 대한 싫증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노래한곡 지우듯 사람을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울 수 있는 일은 아닐뿐더러 버리고 싶대도 쉽사리 버릴수 없는 관계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애초에 시작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두렵다. 참 많은 영화 속에서도 이별이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않는 연인들을 그려왔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건 그중 어떠한 영화의 결말도 ‘그렇게 상처를 받게될지도, 혹 주게될지도 모를 그 끝이 두려운 연인들은 평생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대충 적정한 수준의 대화만 하며 살다 갔습니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설정은 이야기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뭐가되었든 스토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무섭더라도 마음을 조금 열어보고 시도해보고, 그러면 또 누군가는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고, 그러다 마음이 조금 더 열리고 뭐 그러는 식이다. 당연히 그 과정엔 벚꽃만 만발하진 않는다. 서로가 둘도없는 파트너가 되어 진흙탕도 지나고 때로는 피바다도 지나야만 한다. 그게 관계인 것 같다. 그게 싫으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싫은 건 눈막고 귀막고 대충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오랜 비바람을 견디고 결실을 맺을때 함께 손 꼭붙잡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진 않을 것 같다.


나는 한편의 이야기인 우리 인생도 그런 영화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국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관계의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크게 다칠일은 없겠지만 평생 관계의 기쁨도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육지위 어딘가에서 알음알음 어깨너머로 바다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만 주워들을 뿐이다.


혹 잠시 싫증이 났다고 좋은 노래가 안좋은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된 순간이 의미없어져 모두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도, 땅바닥으로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에게 소중한 노래, 소중한 기억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나를 다시 웃게도 만들고 울게도 만들고 그래서 살아있게 만들 것이다. 돌연 그냥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이 와도 기억은 나를 이 세상에 단단히 붙잡아놓을 힘이 있다. 그러니 내가 해야할 일은 그저 순간순간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사랑을 주기에 앞서 지레 겁먹지 않는 것 그것 뿐일 것이다. 쓸데없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보면 미래는 이별보다 훨씬 값진 무언가를 선물해줄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바다 속으로 한번 들어가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이 빗속이라면 비맞기 싫으니 외출을 안하는 것보단 우산을 챙겨들고 나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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