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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리한 말미잘 May 25. 2022

전쟁과 세 개의 상장

"따르르릉"

한밤중, 전화벨이 울렸다. 안절부절못하던 희가 뛰어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며칠째 집에 못 들어오다시피 하던 ㅇ과장이었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어디예요? 안 들어와요?'

"하아.... 아무래도 전쟁이 날 것 같아"

"네?"

"간단하게 짐을 꾸려놓아요"

"짐이요?"

"피난을 가야 할지 모르니"

"정말 그렇게 상황이 안 좋아요?"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큰 딸 유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였다. ㅇ과장의 아이들에게 대통령은 항상 박정희였다. 대통령의 뜻이 무언지도 잘 모르던 시절부터 텔레비전만 틀면 박정희 대통령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대통령의 죽음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과 두려움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대통령이 죽고 이듬해인 1980년, 둘째 인이는 첫째 유이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연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고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흉흉한 소문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라도 광주에서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사진이 아닌 그림이나 삽화로 무시무시한 빨갱이들의 모습이 실렸다. 실제 일어난 상황을 담은 사진은 없었다. 철저하게 언론이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ㅇ과장은 걸핏하면 밤이나 휴일에도 비상근무를 해야 했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고위직 공무원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들 집으로 전화를 하기 바빴다. ㅇ과장도 서둘러 집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희는 작은 보따리를 싸서 이불들 사이에 단단히 숨겨놓았다. 한국전쟁 때처럼  이불 짐 지고 솥단지 메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금이나 보석 이런 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몇 푼 되지 않았던 결혼반지도 이미 팔아먹은 지 오래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팔지 않았던 아이들의 돌반지를 챙겨 넣었다. 이것은 아이들의 것이라 생각해서 깊숙이 보관해놓았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 결혼할 때가 되면 비상금으로 주리라 생각하고 꼭꼭 숨겨놓았었다. 희는 보퉁이 속에 다섯 남매의 돌반지들을 챙겨 넣으며 이것들을 쓸 일이 없기를,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만약에 헤어지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는 거다"                                                                         

  ㅇ과장은 이제 제법 성숙한 티가 나는 고등학생 유이와 인이에게 당부했다. 연로한 어머니와 아직은 어린 용이와 필이를 챙기다 보면 피난 중에 가족들이 헤어질 가능성도 생각해두어야 했다. 지난 한국전쟁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부산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스무 살이었던 ㅇ과장은 열네 살 여동생만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전쟁이 터진 후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입을 덜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고향인 충주로 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 줄 알았으나 도착한 고향 땅에서도 이미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떠나 도착한 대구, 그곳에서 윤은 징집되었고 여동생(아이들의 큰고모)은 피난민들 틈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만 하면 숨이 멎는 것 같다. 오빠를 부르며 울부짖던 어린 여동생의 모습.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도, 부대 담벼락에 달라붙어 가족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여동생의 모습을 찾아 헤매었던 간절한 순간들. 그 아귀 같은 사람들 틈바귀 속에서 새카만 때가 덕지덕지 낀 얼굴로 눈만 반짝이던 여동생의 모습을 발견하곤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가. 그러나 안심한 순간도 잠시, 부대 담벼락 앞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때우는 여동생이 걱정되어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히지 않았다.


  수백 명의 훈련병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대장이 말했다.

"지금은 죽느냐 사느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시다. 우리 부모, 가족들을 위해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한다. 기본적인 훈련을 마치고는 모두 전방에 투입될 것이다."

  긴장감이 흘렀다. 대대장이 이어 말했다.

"갑자기 군대에 오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윤은 이 기회가 아니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손을 번쩍 들었다. 둘러보니 윤 외에도 서너 명이 손을 든 것이 보였다.


"지금 손 든 사람은 대대장실로 오도록"

  윤은 떨리는 마음으로 대대장실로 갔다.

"여동생과 단 둘이 피난 왔는데 제가 여기에 와서 지금 여동생은 오갈 데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무사하게 지내는 것을 봐야 군대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정강이를 걷어 차인 것이다.

"이 새끼야. 지금 전시에 그런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윤은 아픈 다리를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다리가 아픈 것보다 할 말을 했다는 속 시원함이 더 컸다.

"여동생은 지금 어디 있나?"

"부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취사실로 조치시켜"


  꿈만 같은 소리였다. 윤은 바로 달려가 여동생을 데리고 들어와 취사실에 밥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데려다주었다.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무엇보다 부대 안에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이야기 들으니 밤에는 추워서 다리 밑 병자들이 모여 자는 곳에서도 잤다고 한다. 폐병을 앓는 남자가 수발을 해주면 같이 피난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따라갈 뻔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걱정하고 있는 오빠의 마음을 알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빠 옆에 있겠다는 일념이 남매를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ㅇ과장은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었다. 만약에 그때 ㅇ과장이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이산가족이 되었을 것이라고. 큰고모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기를 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만의 하나라도 헤어지게 된다면, 무조건 만나기로 한 곳으로 와야 한다고. 아이들이 잊을까 봐 수없이 되뇌었다.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살만한데, 또다시 전쟁이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ㅇ과장은 계속 보아오지 않았던가. 자유당 시절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했던 경찰들, 어린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그리고 군사쿠데타. 또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거나 죽기도 했다.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을 테고,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너무나 많았다.


  광주에 대한 소식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폭도들은 진압되었으며 서서히 안정되어 간다는 정부의 발표뿐이었다. 서울에서 광주는 너무 먼 곳이었다. 전두환 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했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ㅇ과장도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으며, 피난 보따리도 풀었다. 아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그러나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던 ㅇ과장의 딸들에게 그 당시의 기억들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미 십 대의 한 복판을 지나가고 있던 유이와 인이, 연이에게도 뭔가 부조리한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ㅇ과장이 세검정으로 이사 오면서 고려한 것은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과도 관련이 있었다. 일단 여학교로는 상명여자 사범대학(이후 상명대로 바뀜) 부속 여자 중고등학교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며, 인근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진명여고와 배화여고가 있었다. 남학교로는 청운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경복고야 설명이 필요 없는 명문고등학교였고, 청운중학교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다니면서 급부상하는 학교였다.


  ㅇ과장의 딸들은 세검정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상명여대 부속여중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새로 생긴 학교답게 어느 정도는 자율성과 발랄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젊은 교사들이 많이 부임해오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교감하였던 것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하였다.


  큰 딸 유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친구들을 잘 사귀었고 그들 중의 리더 격이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많은 양의 독서를 하고 있어 정서적으로도 성숙한 편이었다. 젊은 교사들과 잘 어울렸다.

  작은 딸 인이는 언니와 연년생이라는 이유로 항상 언니와 비교당하는 것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정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나서기 좋아하며 개성이 강한 유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인이도 유이 못지않게 머리가 좋았으며 키도 더 크고 늘씬한 미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한 살 차이 언니와 경쟁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인이는 자기 것을 챙기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영특하며 눈치가 빨라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셋째 딸 연이는 언니들에 비해서는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혼자 그림을 그린다거나 소꿉놀이하는 것을 좋아하던 연이는 언니들의 영향으로 책도 즐겨 읽었고, 점차 좀 더 어려운 책도 읽게 되자 아버지가 젊은 시절 사놓은 시집이나 희곡집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연이는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사귀었고, 아침 일찍 등교해 시집을 읽으며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다.


  연이는 김소월도 좋았고 윤동주도 좋았다. 아버지 ㅇ과장이나 삼촌이 사놓은 옛 시집들은 세로 편집이었고, 발간 연도는 단기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집마다 마른 꽃잎이 들어있었다. 연이는 오래된 시집에서 풍기는 곰팡내 나는 헌 책 냄새가 왠지 좋았다. 노래 같기도 한 김소월의 시들은 한참 감수성이 성장하는 시기의 연이에게는 단어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집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집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ㅇ과장이 뒤늦게 입학한 영문과의 영향이 아니었던가 싶다. 누렇게 변색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대사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연이는 또한 연극배우의 꿈을 키웠다.


  세 딸이 모두 다녔던 상명 부중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내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매년 열렸는데, 산문과 운문(시) 두 분야로 나누어서 시상을 했다. 큰 딸 유이는 산문으로 수상을 했다. 다음 해 작은 딸 이도 산문으로 같은 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ㅇ과장기뻐했던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쓰고 글짓기 대회에서 곧잘 상을 받아오자, 역시 우리 집안은 문인의 집안이며 모두 그 피가 흐르고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연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 같은 백일장에서 운문부의 장원을 받아왔다. 사실 연이는 얼떨떨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 대회에 나가 몇 차례 상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1등은 처음이었다. 매일같이 시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가 씌어진 것이다. 그 당시 백일장의 시제는 '거울'이었다.


애처로운 철새처럼

마냥 서러운 마음 속에서

어느 날 나는 깨어진 거울을 발견한다.

깨어진 조각조각을 맞춰보며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조각난 내 얼굴.....


안녕, 안녕

꿈속에서 손 흔들던 소년처럼

꿈속에서도 살고파

아아, 새로운 거울 속에서

난 빙그레 웃는다.


이제 여름,

계절이 바뀐 지금

난 또다시 새로운 거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푸른 하늘과 푸르름 속에서

바람을 느끼며, 난 그 거울을 닦아본다.


(새로운 거울, 1981.5.)


  그 누구보다도 ㅇ과장이 뛸 듯이 기뻐했다. 윤과 희는 아이들이 상을 받아오면 그 장을 허투루 보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받아온 상장과 성적표, 육성회비 봉투까지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 ㅇ과장은 유이와 인이의 상장을 꺼내고 거기에 연이의 상장까지 보태어 거실 제일 잘 보이는 벽에 세 개의 상장을 나란히 전시했다.


  같은 대회에 세 명의 딸들이 모두 수상을 하다니! 역시 ㅇ과장의 딸들이었다. 딸들에 대한 ㅇ과장의 기대는 커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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