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 Nov 01. 2020

감히 고백하건대, '결핍'은 내게 '축복'이었다.

부다페스트에 닻을 내리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본래 첫 글이 되었어야 했다.

몇 해 전부터 내 마음이 말을 걸어왔다.

나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데, 외면하기 바빴다.

그것이 나를 향하든, 누구를 향해 가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어놓고 싶다고..

그래서 시작했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좀 더 내밀한 것으로 들어가라고 여러 모습의 내가 속삭인다.



오늘의 글은 나의 고백 아닌 고백, 민낯 중 가장 순백의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가 빠진 나는 수박 겉만 핥는 격이 될 것이기에.

아무리 멋진 경험이 가득하다 한들, 이 글이 아니면 내가 나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제쯤 더욱 나다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내어놓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해오던 나.



글을 쓸 때마다 난 여전히 두렵다. 대단한 나여서도 아니고, 대단한 것을 써서도 아니다. 그렇지만 난 두렵다.

대단치 않은 내가 뱉은 한 단어, 구, 문장으로도 누군가는 울고 웃을 수 있다, 란 것과 누군가에게 솜털만 한 무게라도 영향이라도 간다면 그 글은 순전해야 한다, 라는 거룩한 부담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꼭 이것을 한다.

바로, 엎드려 ‘기도’ -

꼭 필요한 이야기를 꼭 필요한 때에 쓰게 해 달라고...

워밍업처럼 호흡하는 시간도 꽤 길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글도 그렇다.

그만큼 간절하다. 가벼운 주제든, 무거운 것이든. 온전한 것을 적고 싶다.

내가 겁내는 건 ‘내가 드러나서’가 아니라 내 글 속 한 자락에라도 오만함이 숨어 있을까, 위화감이 실릴까. 내가 좋아서 쓴 글이 누군가에겐 못다 이룬 맘이 될까, 이 외에도 많은 부분으로 두려움이 앞선다.

내 글이 내 의도와 달리 전달될까 봐, 곡해 해석될까 봐.

그런 것이 되지 않길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며 매일의 글을 내보낸다.



대단한 글이 되고자 하는 부담도 싫고, 그저 좋은 글이고 싶다는 이야길 종종 해왔다.

내 욕심인 줄 알지만 모두에게 따뜻하게, 혹은 사람 냄새나게 다가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생'도 따뜻해야겠지,라고 늘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텐데, 그전에 꼭 해두고 싶은 나의 근본, 뿌리를 건들고 싶었다. 아니, 건드려야 했다.



다양한 세계 여행(혹은 삶) 중 종종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너는 여유가 되니까.. 집이 잘 살잖아. 난 꿈도 못 꿔"였다(어찌 보면 다행이다. 옹색해 보이진 않아서) 그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힘들게 고군분투 해왔는지 일일이 전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금 억울한 맘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허락된 상황이 있었기에 움직인 것은 맞지만, 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그럴 수 없음에도'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래서 언젠가. 언젠가 이 글이 읽힌다면.. 하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지금은 안 읽혀도 된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니 하는 것이다.








돌아보니,
지금의 내 충만함으로 가득 찬 삶은
모두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의 첫 해외 경험은 '호주, 브리즈번'이다.

2005년. 첫 워킹 홀리데이로 그곳으로 향했다. 아마도 지금은 만연해진 워홀 여행의 시작점이 그때쯤이지 않을까 싶다. 그 당시만 해도 '워홀'이란 단어는 굉장히 생소한 신조어 같은 것이었고, 외국으로 넘어가는 건, 이민자나 비즈니스맨, 유학이나 여행이지, ‘워킹과 홀리데이'가 결합할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누구도 몰랐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아빠의 사업이 많이 기울었다. 그전에도 기복은 많았다. 오죽하면 내 이상형이 월급 따박따박 받는 '회사원'이었을까. '삶이 왜 이렇게 버거운가'에 대한 고민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거 같다.

(일단 더 깊은 부분으로 들어가는 건 중편 소설 정도의 분량으로 뻗어 나갈 염려가 있으니 건너뛰기로 한다)



참고로 이 글은 ‘누가 얼마나 더 어렵게 살아왔나’에 대해 힘겨루기 하는 내용이 아니다. 나보다 더 힘겹게 살아온 분들도 있을 것이고, 덜한 이들도 있을 거고, 아무 걱정 고민 없이 살아온 사람도 있을 거고. 다양한 형태의 각자의 삶이 있겠지만, 그냥 나의 나 된 이야기, 내 근원 되는 상황과 생각, 다짐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학기 시작 전이었고, 등록금 낼 기한을 훌쩍 넘겨 '재무부’ 학사실로 달려갔다. (기한을 넘겼기에, 계좌 이체나 지로 납부 이런 것이 먹히질 않았다)

엄마가 함께였다. 본인이 같이 가야 적당히 눈감아주며 '잘 받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엄마.   



"너무 늦게 와서 접수가 불가능해요!(굉장히 차가운 말투의 두꺼비 닮은 남자 직원,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이라도 납부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나와 엄마의 바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아직 학기도 시작 전이고, 도대체 뭐가 저렇게 도도해. 내 돈 내고 내가 공부하겠다는데....'라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옆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의 엄마를 바라보기가 '받아줄 수 없다'라는 말보다 더 힘들었다.

지금 보면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는데,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대학이 대체 뭐라고. 돈 따위가 뭐라고(격한 표현 죄송하다. 그때의 감정이 그랬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나요?"

"제적당했습니다."

"아......(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제적이라니)”

말 그대로 ‘당한’ 느낌이었다.

절실했던 학교에 막상 합격하고 나니, 흥미가 덜 했었다. ‘귀한 선물을 적당히 여겼던 내 마음가짐에 대한 벌인가...'

.

.

.

"엄마, 집에 가자!"

"그래도 다시 이야기해보자, 좀 더 사정을 밝히면 받아주지 않을까?"

(교직원의 태도부터가 너무 맘에 안 들었다. 나였어도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에게 그 정도로 야멸찰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송곳 같은 말투와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 나는 괜찮았어도 옆에 있는 우리 엄마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됐어, 그런다고 될 일이 아냐. 나가자."


"엄마, 학교 정문 앞에 맛있는 파스타 집 있는데, 우리 그거 먹으러 갈래?"

"파스타? 그래. 그럴까........."



(파스타 집)

"엄마! 뭐 먹을까? 여기 해산물 파스타도 맛있고....."

".......... 어쩌니,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의 그녀).. 그래도 받아줄 줄 알았는데.. 너무하네.. 우리가 늦게 오긴 했다.."

"엄마! 죄 졌어? 얼굴이 왜 그래... 상관없어. 학교 안 간다고 죽기야 하겠어? 이젠 내가 싫어! 그 이야기 그만 하고 어서 맛있는 거 먹자."


너무 기가 막히니, 정신 상태가 되레 멀쩡해진다. 침착해진다 해야 하나.

그 후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파스타 집 이후부터의 기억은 나질 않는다.



'대학생이 학교에 안 가도 된다? 아니, 못 간다. 이제부턴 무얼 하지?'



그즈음부터인가. 이모 아들(나의 사촌) 조기 유학 준비 소식이 들려왔다. 이모도 몇 년간 따라가서 같이 지낼 거란다.

'호주라니... 살면서 꿈이나 꿔볼 수 있는 나라일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하나, 뭐라도 배워야 하나, 학교에선 이제 완전히 제명된 건가?'




엄마와 이모. 이모와 나.

그 당시에 이모는 내 물질적 지주? 와도 같았다.

커리어 우먼이었던 이모뿐만 아니라, 철도청에서 장을 맡고 있던 큰 외삼촌, 파일럿인 작은 외삼촌,

외갓집 식구들이 하나같이 나와 내 동생한테 용돈 주기 바빴던 때다. 우리 집이 어지간히 어렵긴 했나 보다. 꽤나 큰돈을 자주 용돈이랍시고들 주신 걸 보니.

외갓집뿐이 아니었다. 7남매인 우리 아빠 가족도 마찬가지. 그때 당시 우리 집만 빼고 다 부자였다. (내 기준에선 그랬다)

아빠는 어려서부터 매우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소위 말해, 그 지역 유지의 손자라고 해야 하나. 하나의 읍? 리의 모든 땅이 우리 할아버지 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우리 아빠는 아쉬운 소리를 할 줄 모르고 성장해 왔던 거 같다. 때문에 우리 엄마는 가계가 빠듯해 말라비틀어질 때마다 주변에 '엄한 말을 꺼내야 하는 담당자'가 되어서 살림을 꾸려 갔다(그렇게 하기 죽기보다 싫었을 텐데, 다 나와 내 동생 때문이다)

아빠의 사업은 아빠 주변 이들’만’ 배부르게 만드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본인은 손해 보더라도 옆 사람에게 다 퍼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퍼주기는커녕 받아야 하는 것도 옆 사람이 앓는 소릴 하면, 딱해하던 성인군자(!)였다. 덕분에 우리(나와 남동생)는 거덜 난 심경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엄만 그런 아빠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감내해야 했지만 지금도 감사한 건 그 모든 힘든 과정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기도하는 분이었다는 것. 지금까지도 내게 축복이자 감사라 여겨지는 부분이다.



지금도 난 주변 어른들이 "부모님이 참 올바르게 잘 키우셨네. 걱정이 없으시겠어!(이런 소리 자주 듣는 편. 별명이 야무짐이었다)"라고 하면, 자신 있게 "네, 맞아요!"라고 화답한다. 진실로 그러하니까.

나랑 남동생이 엄마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도 '엄마의 기도, 아빠의 착한 성품이 우릴 힘든 가운데서도 세상이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어. 얼마나 큰 축복이야. 이런 마음으로 커왔다는 게."라고 하면 엄만 "다 하나님이 키워주셨지. 엄마가 해준 게 뭐가 있니"라고 하며 지금도 눈 주변이 금세 벌게져 고개를 떨군다. 난 그 말을 인정하면서도 가끔 '엄마, 아빠가 우리 부모님이어서 우리가 잘 큰 게 맞는데..'라고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는다.



그때의 물질적 결핍으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커서 여유가 생기면 '어려운 이들’은 절대 지나치지 않을 것이란 다짐이었다.

결핍으로 인한 첫 배움이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그렇다.



부족한 것조차도 원망이 아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자란 이유 중 큰 뿌리가 되는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의 기도와 아빠의 따뜻한 성정 덕분이다.

그리고 주변에 사랑 넘치는 이들이 많았단 것도, 내게 일말의 정서적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 근거 중 하나이다.


갑자기 가족 이야기로 빠져들었는데, 왠지 그때의 고마움을 토로하고 싶었나 보다. 활자로 그 감사를 증표처럼 전하고 싶었다.







"등록금 가지고 이모랑 같이 호주로 갈래?" (엄마인지, 이모인지 누가 먼저 제안한 것인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

외국에 발 한 번 들여놓아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아니 꿈도 꿔본 적 없던 나로서는 별나라 이야기 같은 권유에 그저 어리둥절한 마음뿐이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답했다.

"갈래...."



그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첫 외국에서의 삶.

2005년. 생애 첫 모험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 그래프에 변곡점을 찍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호주에서 이모랑 편하게 잘 먹고 잘 살다가 멋지게 유학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멋들어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웬걸. 그곳에서의 삶 또한 '대하 고생 사극' 한 편 펼쳐질 순간들이 허다하기에.

내가 이야기에 대한 굶주림이 컸나 보다.

'호주 한 권 반, 미국 한 권, 아일랜드 한 권, 헝가리 서너 권' 정도의 이야기 전집은 자신 있을 정도로 거리가 많다. 거기에 세계 여행담까지.



아무튼!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로 떠난 호주행이 아니었기에 그곳에서도 고군분투할 일이 많았다.

‘이모가 책임져 준 거 아냐?’

노노! 내 삶인데 이모가 왜 책임져주나. 다만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뿐이지(상황적, 금전적 도움을 주긴 했지만, 다 큰 성인을 전부 맡아줘야 했던 건 아니었다).



이모 집에서 5개월 정도를 지내다가 혼자 독립한다고 큰소리치고 나왔었다(이모 탓은 아닌데, 얹혀 산다는 기분이 나를 꽤나 옥죄었다).

그때 내 수중에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50달러가 채 안되었다. 호주는 2주마다 방값을 내는 후불제? 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짐 싸들고 그냥 나왔다. 내 가능성을 믿고 까불 수 있는 행위였다.

‘2주 안에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라고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난 그야말로 길거리에 나 앉을 신세로까지 전락할 뻔했다.

아르바이트비는 선불로 요청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그 이후로 내 정신은 폭풍 속에서 헤엄쳤고 끝이 안 날 것 같은 회오리 가운데 허우적거렸다. 어떤 고생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꽃다운 처자의 모습이 지금 떠올려봐도 처절하고, 먹먹하다.

국제전화 카드(그땐 카톡 없었음) 잔액이 아쉬워 보물처럼 소중히 전화를 걸던 내 모습도 아른거리고, 전 재산이 50달러밖에 없어서 텅 비었다,라고 느끼던 내 모습(그럼에도 집에 말할 수가 없었다)도 생생하다.

그때 당시엔 내가 힘들수록 엄만 더 힘들 거라 생각했던 나름 효녀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엄마 사랑은 극진했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여담인데, 엊그제인가. 친구랑 어려운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감정 이입해서 "쌀이 없어 밥을 못 먹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어"라고 화두를 건넸는데 친구 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요즘 시대에 쌀이 없어 굶는 사람이 어딨냐!"라고 하더라.

세상에나. 너무 화가 났다.

아픔을 이해는 못 해도,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황당한 이야기 좀 보소’라는 뉘앙스로 내뱉다니. 지구 상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있거든? 있어!"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다. 내 옆에도. 지금도.

그리고 그때의 내가, 우리 집이 그랬다. 쌀이 없을 정도의 어려움.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래도 국수는 있어서 멸치 우려낸 육수?로 잔치국수는 먹을 수 있었단다.

그걸 호주에서의 1년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엄만 '그랬었다..'라고 전해줬는데, 난 지금도 그 얘길 하면 그냥 운다. 대놓고 울어버린다. 그래서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도 말하지 않는다.



(호주에서) 하루 종일 울면서 일자리를 찾아다녔던 나, 당장 내일이라도 한국으로 가야 할 내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실성한 여인처럼 뛰어다녔었다. 영어 실력을 늘리고자 현지 job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국 식당이나 한국말을 사용하는 곳을 찾았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나름 똥고집스런 소신이 있어서 고생을 사서 했었다)

결국 다 포기하고 반년 만에 호주 생활을 접으려고 할 때 기적같이 나타났던 ‘케밥 집 알바, 대학교 새벽 청소’.

나 능력자다. 투잡을 동시에 얻다니!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난 만 1년을 꽉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첫 성공적인 인생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도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스무 살 갓 넘은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삶의 무게는 그 당시가 가장 무거웠지 않았나 싶다.

이 힘들었던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도 엄마, 이모밖에 모른다. (아빠도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한 줄은 모른다)



결핍으로 인해 갈망할 수 있었던 의지와 소망.

기도 없이는 숨도 못 쉴 것 같았던 나였다.

그 가운데 나는 매일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면 이렇게 가깝게 두시려고 나를 힘든 길로 인도하시나.. 별 생각 참 많이도 했다.

지금도 길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질 때면 이런 반응이 바로 뒤따른다. ‘제가 너무 혼자서 멀리 걸어와 버렸나요? 다시금 엎드리겠습니다.’



'이런 나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느꼈던 치열했던 성취감- 그것이 내 두 번째 배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배경이, 능력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바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고백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호주를 겪어보니, 세상이 넓고 무한하더라.

이 이후로 나는 기회가 열리는 모든 것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세계를 배경으로 난 많은 곳을 쏘다녔다.

(물론 호주에서 돌아온 다음 학기에 학교로 복학? 재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도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다녔다. 나름대로는. )






여기서 잠깐, "너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컨셉으로 내 지난 여정과 여행을 돌아보았다.

기억나는 순으로만 적었다. 나름 나만의 세계 여행 기록이다. (누락된 나라랑 도시가 있을 수 있다)



2005.1-2006.1 : 호주- 브리즈번

2006.1 : 일본-도쿄

2007.7  : 태국, 방콕

2008.6-9 : 미국,  LA, 코네티컷 버크셔, 뉴욕, 보스턴, 워싱턴 (캠프 스텝 & 여행)

2009.6-8 : 호주, 시드니 Amnesty International 인턴쉽

2010.3 -2013.9 : 한국, 회사 생활

2011.6 : 인도, 첸나이

2012.9 : 대만, 타이베이

2013.9 :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외..

2013.9-2014.5 : 아일랜드- 더블린/

스페인-바르셀로나, 뚜델라, 자라고사/

벨기에- 브뤼셀, 브뤼헤, 겐트/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 오베르쉬르우아즈/ 영국-런던, 켄트(기독교 공동체)/

체코-프라하, 체스키크롬로프/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 오스트라이-비엔나

2014.5-7 : 헝가리-부다페스트, 그 외 여러 도시.

2014.7 : 터키-이스탄불

2014.9-2015.2 : 한국 (대학원 일)

2015.3-4: 인도-푸네 (아빠랑 한 달 같이)

2015.6 : 일본-도쿄

2015.6-2020. 현재 :  헝가리 - 부다페스트

2016. 10월 :인도- 푸네, 뉴델리

2018. 2 : 인도- 푸네

그 후 : 몰타 - 발레타, 마셜록, 음디나/

이탈리아 - 밀라노, 피렌체, 로마, 베로나, 베르가모, 나폴리, 카프리, 쏘렌토, 포지타노, 폼페이, etc./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트/

스페인-마드리드 + 남부일주(톨레도, 세비야, 론다, 말라가 등)/

독일- 베를린/

루마니아-부쿠레슈티/

세르비아-베오그라드/

스웨덴-스톡홀름/

오스트리아-짤츠캄머굿, 잘츠부르크 등등



이 중 5개 정도의 국가를 빼고는 모두 혼자 여행을 하였다. 유럽에서 지내는 특성상, 맘에 드는 국가나 도시는 중복해서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편이다.

그냥 스쳐가듯 지나온 여행보다는 길게 스며들어 다녔던 곳이 대부분이라 모든 장소에 대한 기억이 또렷해서 앞으로 내 글감의 소재들이 될 것이다.



'다 해서 얼마 썼어?’

얼마냔 말이지. 저 모든 여행과 해외 생활의 경비는 내 '한 학기 등록금' 그것이 전부였다. 가능한 말인가? 가능한 말이다.

(내 지난 15년이 하나의 책이라면 제목은 '한 학기 등록금으로 떠난 세계 일주'로, 어떨까?)







이 많은 곳을 겪을 수 있었던 원천은 물질이 아니었다.

'나의 꿈과 기도'였다.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내게 가장 풍성했던 자산이 있다면 '결핍, 꿈 그리고 기도'였다.

감히 단언하건대, 결핍이 내겐 큰 자산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많은 것들이 원래부터 주어져 있었다면,

난 등록금을 못 내 호주로 가지도 못 했을 거고, 그러면 그 후에 '꿈을 품으면 이루어진다. 도전은 해볼 만한 것이다'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족했기에 기도하고, 아무것도 없었기에 꿈을 더욱 진하게 그릴 수 있었고, '그럼에도 된다'라 과정을 지나왔기에 감사를 고백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안 되는 것’이 있다 해도 감사의 제목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없었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과 갈망도 없이 지금의 나를 내어놓는 이런 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나를 지양한다(조심스러운 말이다). 다 가지고 있는 삶엔 꿈이 없다. 오히려 다 가진 것은 생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감히 고백하건대, '결핍'은 내게 '축복'이었다.



이 말을 자신 있게 하기까지 '살짝 아팠던' 청춘 15년이 걸렸다.



위의 모든 과정이 단 하나도 내가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 된 것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 어떤 성취나 만족도 작거나 소홀한 것이 없었다. 모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매 순간 감사할 수 있는 내 믿음의 고백. 이것이 결핍이 내게 가르쳐준 세 번째 덕목이다.


일부러 의식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내 감각을 후려칠 정도로 본능적으로, 때에 맞게 감사할 수 있다는 매 순간의 고백이 나의 자랑이자 가진 능력이라면 능력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난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내게 주어진 것이 나에게 있다가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러다 또다시 내게 다시 다가올 수 있는 그런 오고 가는 것이란 걸 안다.

없을 때도 받아들이(기 까지 쉽진 않지만)고, 그것 또한 감사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마음.

이것이 나의 결핍 중 얻은 네 번째 가르침이다.



나는 평소 ‘이렇게 할 거야'라고 쉽게 단언하거나 장담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이란 고백과 기도를 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고, '내게 허락된다'라고 믿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믿는 내 고백.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던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헤쳐오고 이뤄낼 수 있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고 그게 지금을 만들지 않았을까,라고 바로 답해본다.

그저 열리는 길만큼만 걸어가겠습니다. 그 고백 하나로 지금의 내가 있다. 내가 대단한 걸 해냈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난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을 뿐인데, 내 기대 이상의 큰일들이 펼쳐졌고, 지나쳐왔다, 라는 것에 대한 지나치게 긴 설명일 뿐이다.



믿음과 그 속에서 피어난 용기, 이어지는 다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결핍이라고 생각지 않고 지내왔던 내 마음도 지금 보니, 감사의 제목이자 은혜이다.

한 번도 힘들단 얘기 안 하고 살아온 건 아니지만, 내 삶에 대해 덩그러니 내어 낱낱이 고백하는 일(그것도 이렇게 대놓고)은 생전 처음이라, 지금 쓰는 이 순간 계속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이건 아파서라기보다 그동안 '괜찮다'라고만 일관했던 내 태도가 너무 안쓰러워서이다. (조금 오글거리는 멘트이니, 양해 바란다)

그래도 감정을 자연스레 비추어 가며 함께 적어내려가니 마음도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건 차마 예상치 못 했던 결과라 이득을 본 것만 같아 토해내길 잘했다 생각한다. 계속해서 솔직한 글 많이 담아내려면 오늘의 이 시간은 꼭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앞으로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영글어가는 내가 되고 싶단 꿈을 꾸어본다. 내 글도 그러한 것이길 뒤이어 바란다.



God makes it happen, and I just follow him.




헝가리에 살고 싶다,라고 바라게 된 결정적 장소, 어부의 요새에서 - (5년 전)






(덧붙이는 말)

지금 우리 아빠는 현재 인도에서 멋지게, 건강히 본인 일을 해내고 계신다. '아빠 같은 사람이 성공해야지 누가 해. 도대체'라고 투덜거렸었다. 늘상 맘속으로. 얼마 전엔 아빠가 지은 건축물이 한국의 신문, 몇 군데에 소개돼서 그 기사를 보고 '아빠, 멋지다' 혼잣말을 하며 축하 카톡을 드렸었다. 눈물이 찔끔 나려 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일인데 울기 싫었다. 인도에 가면 아빠가 이룬 - 아빠 혼자 해낸 건 아니고, 도우심이 컸다 - 일들이 너무 감격스러워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덧 인도 직원 수백 명이 몸 담고 있는 회사의 부사장이 되어 지금도 피땀 흘려가며 일하고 계신 아빠.

여태까지의 고생이 자산이 되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선교 구제'에 힘쓰시는 우리 엄마.

‘내 동생답게' 본인의 몫을 잘 해내고 있는 남동생. 리 감독 화이팅!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멋진 놈이다. 자랑스럽다.

부모님께서 지금까지도 힘겹게 살아가고 계시다면 이 글을 차마 못 내어놓았을 거다. 사실 지금도 조심스럽다. 이걸 보게 된다면 엄마 마음이 미어질까 봐.. 난 괜찮은데 말이다.

이전 28화 ‘권태로움’ 해결법, 그 지름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