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음 갑옷'을 입는다!

by Cecil

대학시절 IMF를 겪은 세대. 96학번. 정치학 전공자였던 2학년 시절에 경제 대공황 상태에 빠지며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경영이나 신문방송 같은 소위 취업이 그나마 잘 된다는 전공들을 복수 전공하느라 바빴다. 전공 필수였던 정치철학 수업을 들으며 '철학'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며 시대를 역행한다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타과생은 단 한 명도 없는 철학 전공수업을 신청하고 급기야 복수전공까지 하게 된다. 덕분에 취업 원서를 쓸 때는 그나마도 힘든 시절 더 곤궁에 빠지게 되었지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결코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경제적 파탄에 빠지고 청년들은 심리적 도탄에 빠졌던 혼돈의 시절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마음의 갑옷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칸트와 헤겔을 배울 때는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다가 눈물이 날 지경이라는 말을 통감하며 글자가 적힌 종이 뭉치 같은 책들에 파묻혀 암호해독 수준의 글들을 한 줄 한 줄 읽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구조주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문학 철학 시간에 나오는 과제들 때문에 한 학기 내내 주말에는 아무도 보지 않을 예술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서 졸면서 보다 말다 반복하며, 되지도 않는 썰을 풀어 리포트를 쓰기도 했다. 정치학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민주주의, 국가, 자유론 등등의 과목들도 사전같이 두꺼운 책을 읽고 과제를 제출하고 두 문제에 빈 종이 4장을 채우는 시험을 4일 내내 치르기도 했다.

'지금 이 나이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다!'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나이 먹어서 칸트랑 헤겔을 만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20대 초반에 가방 메고 다니는 마지막 시절에 실컷 머릿속에 욱여넣자는 생각이었다. 결국에 그 선택은 옳았다. 정말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던 그 많은 내용들은 20대 중반을 지나고 사회에 나오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하나씩 둘씩 '아하! 그 말이 이것이구나!'라는 번쩍이는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가령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 없이는 불가능한가?'에 대한 토론 준비를 위해 읽었던 자유론, 자본론, 공리주의 등등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내 돈을 벌어 내가 써야 자유롭다.'라는 인생의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 덕에 바쁘고 즐겁게 내 일을 찾아 워킹맘의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인간관계론, 공자 논어, 허무주의, 니체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실망하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예술을 사랑하는 힘이 세상을 살아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진리도 곰브리치를 통해 깨달았다.


사실 인문학 책들은 읽는 당시에는 처음부터 마구마구 즐겁고 재밌지 않다. 물론 천재적 석학분들은 재미와 감동마저 느끼실 수 있으나 평범하다 못해 이해력이 매우 느린 나에게는 무겁고 어려운 과제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들은 주인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이런 무슨 막장드라마 같은 내용이 명작이냐며 욕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책장을 덮으면 알 수 없는 인간의 고뇌나 고독 같은 게 밀려온다. 안톤 체호프 단편선이나 톨스토이 단편선을 보면 또 마음이 따뜻해지고 사람의 온정을 느끼기도 하고 까뮈의 '이방인'을 보면 세상 우울함은 다 담겨 있는 스산함을 배운다. 한국문학들을 읽으면서 지금의 내가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배우고

조지 오웰'1984'나 올리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 디스토피아에 대한 심사숙고 하게 된다. 등등...

재미는 나중에 따라오는 것. 결국 조금이나마 나은 인생을 살겠다는 염원으로 읽어 낸 인문서적들은 마음의 양식을 넘어 든든한 갑옷이 되어 있다. 인문독서는 어떤 일을 시도할 때 주저함이 없고 타인의 눈치 따위 보면서 차일피일 미루지 않는 견고한 갑옷이기도 하고, 나의 약점을 후비고 들어와 뿌리부터 흔들어 버릴 듯 덤비는 상대에 맞서 냉철하게 방어하고 종국에는 승리하게 만드는 강한 갑옷이 되기도 한다.


불안한 IMF 시절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정치학과 철학 공부는 대학 졸업 이후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힘든 순간 책에 의지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인생의 고비마다 지혜로운 석학들과 선인들의 경험과 지력에 의지하고 마음을 바로 세워 풍파에 맞설 수 있는 갑옷을 장착할 수 있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양식 정도가 아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갑옷이다. 정보와 뉴스의 홍수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거리며 나를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목격한다.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20대의 내가 선택한 인문 독서는 30대를 지나 40대의 나를 지탱하고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 갑옷을 입기 위해 책장 앞에 선다. 그 어떤 풍파도 나를 흔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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