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 인생

인생은 모두 계약으로 이루어졌다.

by woo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는 금융위기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들이 몸을 사리던 해였다. 단지 높은 학점과 관련학과 자격증 하나만 가지곤 서류통과도 쉽지 않았다. 취업 N종 세트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탓과 여러 가지 경제 상황이 맞물려 이름 번듯한 대기업 정규직은 힘들었다. 생계가 급했던 나는 소기업에 취업을 했지만 회사는 점점 경제적 궁지에 몰렸고 눈치껏 퇴사를 택했다. 사장님은 몹시 미안해했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고 그래서 가게 된 두 번째 직장, 학원이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리치는 보습 학원이었고 근 반년을 일하면서 느낀 점은 그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시 퇴사를 했고 다른 꿈을 가졌지만 생계는 쉴 수 없는 것이기에 또다시 구직이 시작되었다.


지방 국립대 졸업장과 높은 학점으로 대기업 정규직은 어려웠지만 대기업 계약직은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적당히 싸게 부릴 수 있는 만만한 직원이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내 첫 계약직 인생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첫 직장이 평생을 결정한다고, 그래서 계약직은 최악의 선택이고 무조건 존버를 해서라도 정규직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 어쩌면 거의 8년째 계약직을 전전하고 있는 나를 보면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계약직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내가 깨달은 바는 어차피 인생은 전부 계약직 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규직이 평생직장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60세를 기점으로 정년퇴직을 하는 계약이란 점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심지어 급변하는 사회에서 그 정년이 반드시 지켜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다면 계약직보다는 나을 것 같다. 급여에서 차이가 나고 일에 욕심이 있다면 계약직의 한계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다른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생계가 중요했기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건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정규직 입사를 준비했던 이에게 계약직은 자존심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어쩌면 또 다른 기회가 될지도 모를 것들을 놓친다.


처음 대기업 계약직으로 입사해서 1년을 일하고 또 1년을 연장해서 2년을 일했다. 그리고 그 당시 정부의 기조에 맞게 내게도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있었다. 어렸고, 치기 넘치던 시기에 그 제안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또 다른 꿈이 있었으니까. 꿈이 이토록 이루기 힘든 것인지 알았다면 그때의 제의를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아무튼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랐다.


호주. 낯선, 그래서 두렵기도 한 그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워킹홀리데이로 간 거였는데 돈이 떨어지기 전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 탓이다. 다행히 한 달의 마음 졸임 뒤, 원했던 호텔에 하우스 키핑 일을 구하며 두 번째 계약직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6개월짜리. 한 사업주 밑에서 6개월을 넘길 수 없는 법 때문이었지만 사실 6개월을 버틴 것도 대단하리라만큼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가장 즐겁고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그 이후 구청에서, 공기업에서 계약직을 거치며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경험한 바로는 계약직에는 장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먼저 일에 대한 책임이 적기에 내 미래와 나에 더 몰두할 수 있다. 회사에 얽매이고 그 안정감에 도취하면 퇴사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한다. 월급이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이 시대에 더 이상 영원한 직장은 없으며, 심지어 한 개의 직업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인생의 꽃이 늦게 피는 사람이 있는데, 단지 20대에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가오는 만개의 시기를 아예 묵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똑똑하고 영리하게 계약직을 이용하여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 씨를 뿌리면 된다. 무엇을 심을지, 무엇을 꽃피울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정규직이 답이 아니 듯 계약직도 답이 될 수 없지만 단지 두려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담담하게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지만 걷다 보면 풍경이 변하고 새로운 길이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모든 것은 그대들의 선택이다.


앞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나의 계약직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이들이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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