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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맘 Aug 23. 2020

사서 고생

 최근에 무모하게 시작한 일이 있어 이 날은 별이가 유치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바삐 뛰어다녔다. 별이의 유치원 하원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계획한 일들을 꼬옥 마쳐야만 했다. 미리 절차를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정확히 챙겼다면 나는 조금은 덜 서두를 수도 있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난 닥쳐야 일을 하고 또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날 밤 그 일을 늦게나마  진행하려고 했지만, 별이의 재미있는 일상 사진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할 욕심에 그만 그 계획을 다음날 아침으로 넘겨버렸다. (잠자리 이야기를 쓰느라 그랬다.)  하지만 유치원생들의 아침은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분명 늘 같은 아침 등원 준비일 텐데 얼마나 스펙터클 한 지 아이를 등원시켜 보낸 엄마들은 그 날 일어난 특별한 일에 대해 서로 공유하기 바쁠 정도다. 우리는 일찍 일어난 날도, 늦게 일어난 날도 늘 늦는다. 그래서 우리의 아침은 항상 바쁘다.


 필요한 물건은 제일 필요한 순간에 안 보이고 시간이 부족한 날 가장 할 일이 많다. 이 날도 그러했다. 나는 가야 할 것이 네 군데나 되었는데 미리 처리하지 않은 지난날의 나를 탓하며 별이에게 오늘 나의 할 일에 대해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오늘 네 군데를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둥 그것이 어려우면 세 군데를 다녀오고 한 군데는 나중에 다녀와야 되겠다는 둥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별이는 가만히 얘길 듣더니 엄마는 다 갈 수 있을 거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본인 딴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걱정하는 내게 위로와 격려를 해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후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별이의 말이 마법처럼 마치 내가 그 일을 그 시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꼬옥 해내야만 하는 목표가 되어 버렸다. 오늘 모두 처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별이와의 시간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 시작은 순조로웠다. 예상한 시간만큼 모든 일은 착착 이루어졌다. 사실 나는 세상에 갓 태어난 어른 같았다. 마치 오랜 시간 긴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 같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불안하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웠다. 아주 잠깐 초등학생이 될 내년의 별이를 생각해 보았다. 별이에게도 오늘의 나처럼 비슷한 감상을 하게 될까.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틈틈이 나는 별이를 계속 떠올렸다. 앞으로 더 넓은 세계로 아주 먼 여행을 떠나게 될 별이를 상상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잠깐 동안이나마 마음먹었다.


 역시나 나의 마무리는 그리 평범하진 않았다. 제일 처음 간 곳에서 처리한 서류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 때문에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 장소를 또 찾아야 했다. 내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버스를 이용하며 여행하듯 즐기던 나의 이 하루는 급히 콜택시를 부르고 서류를 들고 마구 뛰어다니다 결국 뻗어버리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적인 나의 아침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오늘은 특히나 함께 별이의 미술 학원을 다녀오는 날이었다. (이미 유치원 수업만으로도 충분하기에) 방과 후 수업이나 학원 다니기를 거부하는 별이가 유일하게 선택한 것은 미술 학원이었는데 그것은 만들기 선수가 되고픈 별이가 어쩔 수 없이 꼭 다녀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 곳을 별이는 꽤 마음에 들어하긴 하지만 본인의 만들기 실력이 그리 늘지 않는 것에 가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만들기 선수가 되고픈 별이의 작품들은 집에 넘쳐난다.

작품명 : 버튼. 

작품의 의미 : 알지도 못하고 묻지도 않음.


또한  온라인 장보기를 생활화하는 덕분에 재료는 더 넘쳐난다. 

작품명 : 캠프 파이어와 마쉬멜로우

엄마가 예상하는 작가의 의도 : 캠핑에는 머쉬멜로우가 제격!

                                  나의 마쉬멜로우는 평범하지 않고 빛나지, 나처럼.

                                  (참고로 별이도 나도 마쉬멜로우 안 좋아함) 엄마의 감상 : 고마워요 마켓 컬리


 별이의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난 근처 카페에서 나만의 작가 놀이를 하는데 이 날만큼은 별이가 오기 전까지 숨차 오르도록 달리기를 한 터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제의 나 자신을 조금 반성하고 오늘 잠시 내 탓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신랑은 처음부터 나의 계획을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본인이 반차를 사용해 나를 도와주려고도 하고 힘들게 버스를 타지 말고 택시를 타라고 알려주기도 하였다. 나는 평소에 심한 길치여서 같은 길도 아주 여러 번 내가 직접 발로 다녀야만 외울 수가 있었고 운전 실력까지 부족하여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비효율적인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자기 확신 또는 자신감이 지나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세상에 의지로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냐며 난 호기롭게 진행했지만 결국 나는 서류를 꼼꼼히 챙기지 못하고 결국은 다음 날 다시 오라는 전화를 카페에서 받게 되니 솔직히 허탈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그런 내가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느껴졌다.


 만들기 수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끝낸 별이는 놀이터로 더 자연스럽게 향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애원을 가장한 강요로 별이를 집으로 이끌었고 많이 속상했을 테지만 별이는 조용히 따라주었다. 난 거실에 누웠고 별이는 혼자 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권의 책을 꺼내 세웠다. 별이 장난감 친구들의 집이었던 그것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리면 더하는 일곱 살 별이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세우기 시작했고 곧 나도 함께 하기를 바라였다. 나는 말없이 책을 몇 개 세우는 척을 하고는 또다시 누웠다. 사실 그건 너무 쉬운 놀이법이었다. 역할 놀이도 아니었고 만들기 놀이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책을 세우기만 해도 되었기에 나는 이 놀이 방법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 또한 어차피 다 세워야 끝날 것을 나는 이미 여러 번 학습하였다. 저항해봤자 오열하는 별이를 마주할 힘이 내겐 조금도 없었다. 나는 늘 눈 앞의 상황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는 별이 아빠 말처럼 거침이 없었고 나의 생각처럼 끝이 없었다... 늘 그렇듯.


 그리고 나도 노력으로 안 되는 것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넘치게 부지런을 떨고 빠르게 지쳤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이큐의 천재들 한글판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별이가 혹시 이 책이 영어로 되어 있는 것도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있을 것이라 대답해 주었고 별이는 갖고 싶다 이야기하였다. 책 소유욕에 관해서는 무척 관대한 나는 별이 수준을 훌쩍 넘긴 이 책을 샀고, 나도 별이도 여전히 이 책을 버거워한다. 이렇게라도 갖고 노니 다행이다 싶었던 나는 곧 이어질 상황에 이 책을 산 것을 아주 잠깐 후회하기도 하였다. 나는 하지 말라면 더하는 별이에게 '반대양'이라고 공격했고 함께 세우지 않고 누워만 있는 내게 별이는 '게을러 씨'라 구박했다. 끝을 모르는 바빠 양, 우리 별이.


 그리고 우리가 잠든 사이 집에 돌아올 아빠를 위하여(아니면 치우지 않은 책을 보고 몹시 힘들어할 아빠를 위하여) 우리는 방에서 부엌으로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아빠를 무척 사랑했으므로. 다음 날 아빠는 그 책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딱 잘라 대답했다. 모든 것은 그저 자연스러웠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다. 




사서 고생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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