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의 수레바퀴(feat.BTS의 피, 땀, 눈물)
BTS는 독서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그 바쁜 스케줄 중 책을 읽는다는 '짬짬이 독서' 혹은 '틈새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이 알려지면서 많은 팬들이 그들의 독서 습관을 본받기도 한다니 스타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합니다. 또 독서를 숙제나 부담으로만 인식하게 만든 사회문화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밥 먹는 것처럼, 휴식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면 독서는 정말 행복한 습관이 될 수 있을 텐데요.
BTS의 추천 도서 목록에는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기억 속에 잠자고 있는 고전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프란츠 카프카, J.D.샐린저, 서머싯 몸, 소설가뿐 아니라 심리학자 구스타브 융 기타 등등. 독일의 문호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이 특히 유명해졌습니다. BTS의 뮤지컬 '피, 땀, 눈물'의 뮤직비디오가 이 책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에 이 책의 판매고가 1만 부까지 올랐다고 하니까요.
헤르만 헤세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문장가로 알려져 있지만 <데미안>은 사건이 아닌 감정선을 따라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탄탄한 사건 전개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쓴 게 40대 때의 일이니, 그때까지 자신이 품었던 청소년기의 기억, 그것도 사건이 아닌 생각의 기억을 풀어놓은 것이지요. 머릿속 뇌 한 구석에 한 번 떠올랐다가 사라질 그 생각들을 모아 정리하여 그렇게도 술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헤르만 헤세가 문호로 칭송받는 것이겠지요.
<데미안>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가족에서 자라납니다. 당시 이성으로 공고했던 독일 사회의 모습이 싱클레어 집에 미니어처처럼 자리잡고 있지요. 규율을 중시하고, 보수적이고. 그 보이는 '선(善)' 안에 숨은 '악(惡)'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자란 싱클레어가, 학교라는 사회에서 처음으로 실체적인 惡엑 맞닥뜨립니다. 그것은 크로머라는 친구입니다.
유아기는 아이를 사랑만하는 착한 어머니의 세상입니다. 이 시기를 지나 학교를 기점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맞게 되는 세상은 가정에서 배우듯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뮤직비디오 <피, 땀, 눈물>에서 주인공은 멤버 '진'입니다. <데미안>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와 대비되지요. 그리고 RM과 정국은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은 '악령'을 뜻하는 영어 demon과 연관되는 말이지요. 두 사람은 나머지 멤버들에게 조금씩 '악(惡)'을 드러냅니다.
에밀 싱클레어는 '삥 뜯는' 크로머의 요구에 말려 들어갑니다. 크로머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데 이 때문에 저금통을 깨고 집 안의 돈을 훔치게 되고요. 에밀은 이러한 요구에 맞서지도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에밀이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에밀이 속한 사회 안에 있겠지요.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을 지배하던 경건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인합니다. 독일은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기독교를 한바탕 뒤집어 엎었잖아요.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한 이유는 교황이 성경의 말씀을 잊고 타락한 때문이었고, 개혁이 성공한 이후 성경에 치중하다가, 이 시기에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자는 생각으로 돌아섰습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주변의 어른들은 예의를 강조하고 한정된 사회관과 윤리관을 강요하지요.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고 늘 성경을 끼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본인들은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생각 아닌 성경의 말씀이니 얼마나 강력하겠어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자신을 쉽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그를 정신적으로 보살피는 마리아에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늘 그런 경건한 마음이 굳건하게 자리잡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 날기 시작하면 그렇습니다. 날 수 없을줄 알았는데 날기 시작하면, 태양 가까이 가고 싶거든요. 그러다 보면 태양도 우습게 느껴집니다. 인간은 욕심을 가진 존재이고 이 욕심이 나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누르기에도 시간이 바쁩니다. 그러나 채우기에 바쁘지요. 그러는 동안 그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고 있는줄 모르고요. 바로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입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그런 사회의 희생양입니다. 선(善)이란 한 글자가 사라는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운명입니다.
<피, 땀, 눈물>에 등장하는 피에타는 그렇게 관념과 자만에 의해 이상화된 선을 상징합니다. 그 선은 성경이 말하는 선의 실체가 아니지요. 석고상이요, 각자의 아집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입니다.
BTS 진이 우리 안의 욕망과 마주하게 되면서 피에타 상의 얼굴이 깨집니다. 예수 어머니인 성모의 얼굴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낸 선(善)의 기준이 깨지는 겁니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이카루스는 '날개'라는 초인간적 능력을 부여받았는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태양 가까이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날개를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꼭, 부득불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갑니다. 그 욕심을 이기는 자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그 정도의 절대 善이 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욕망 때문입니다. 나쁜 것이 惡이 아니라 욕망이 惡입니다. 아니, 욕망이 惡을 낳는 것이지요.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는 알을 깨고 나옵니다. 악을 직시하고 이해했기 때문이죠. 진이 이카루스를 마주보고 키스하는 장면입니다. "나라면 날개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제 착한 어머니의 세상에서 나와 욕망의 세계를 만나도 당황스럽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악을 미워하기만 하면 살아나가지 못합니다. 때로는 끌어안고, 때가 물리칠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악의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악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욕망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싱클레어의 친구 데미안은 처음부터 악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의 죄질을 논하는 싱클레어 앞에서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카인의 마음을 역설했지요. "그런 나쁜 놈을 이해하다니 너도 나쁜 놈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나는 영원한 철부지일 뿐입니다.
다른 멤버들은 그 악을 견뎌내지 못하고 추락하거나 타락합니다. 오직 진만이 이 악을 직시했기 때문에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인데요, 세상의 온갖 악을 제시하고 뿌리는 역할을 RM과 정국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정국이 입은 셔츠에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와 달리 알을 깨지 못합니다.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보기 드문 영재로 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란 한스는 아버지의 자부심에 부합하겠다는 부담감 아래서, 목사님의 가르침과 교장 선생님의 과외로 여름 방학을 보내고 마울브론 수도학교에 입학합니다. 이 학교의 이름이 헤르만 헤세가 다닌 학교와 같습니다. 좌충우돌 사고뭉치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공부를 잘했다는 헤세와 한스가 교차하는 지점이지요. 자유로운 영혼의 헤세는 이 학교에서 탈출해 숲 속에서 지나다가 경찰에게 잡혀 퇴학을 당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의 친구 헤르만 하일러의 최후(?)로 대체됩니다.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 깔립니다. 반면 에밀 싱클레어는 알을 깨고 나오지요. '수레바퀴'는 변화와 안정을 거듭하며 공고해진 관습, 혹은 그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성을 중시한 기성세대의 사회에서 감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와의 갈등은 18-19세기 서양 문학의 중요한 축입니다. 감성은 사고를 내고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지만, 이성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또다른 폭력을 낳기도 합니다.
한스를 둘러싼 폭력. 아버지를 비롯한 온 마을 사람들의 기대가 본인의 의사를 짓누르고, 삶을 송두리째 들어냅니다. 이를 만들어 낸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도, 총을 들지도 않았고 미움도 없으며 악의를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게 옳다'는 믿음이 합쳐졌을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 <수레바퀴 아래서>의 수레바퀴이었고,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깨고 나온 알로 형상화되었습니다.
헤르만은 <수레바퀴 아래서>를 29세(1906)세에, <데미안>을 42(1919)세에 썼습니다. 에밀싱클레어와 데미안, 한스와 헤르만 하일러는 모두 헤르만 헤세 그 자신의 모습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29세에 수레바퀴에 깔린 자신을 썼고, 42세에 알을 깨고 나온 자신을 다시 썼지요.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스를 경험한 헤르만은 한스를 통해 죽음에 의한 포기를 간접 체험한 모양입니다. 그는 20년 후 성장하여 다시 한 번 에밀 싱클레어가 된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온 모습을 그립니다.
우리는 20세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까지 우리는 어떤 형태든 기성세대가 만든 교육과 사회시스템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헤르만 헤세가 한스를 죽이고 "수레바퀴를 끌고 나갈 운명"을 언급한 것은 그 사회시스템 안에서 성장과 고통을 견뎌내야 할 우리 모두의 운명을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이제 수레바퀴는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 바퀴로, 그래서 나무에서 화학물질로 바뀌었고, 이제 4차산업혁명을 겪은 후의 미래에는 없어질 것으로 예견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한 독일의 1900년대 전후 사회 및 교육 분위기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많이 대비됩니다. 본질에서 멀어져 아이들을 줄세우는 교육, 그 교육으로 자라난 기성세대는 여전히 가슴 속에 피라미드를 안고 삽니다. 현재 독일 교육은 경쟁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아직 우리 아이들은 경쟁에 내몰리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고민의 결론이 첨단 기술로 바퀴를 사라지게 하듯,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어지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미래 사회를 이끌 사람은 너희들이다."라는 부담감과 함께 4차산업혁명을 주입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