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삶에 관한 따스한 생각

알렙이 알렙에게(최영희 글: PJ. KIM 그림:2018:해와 나무)

by 릴리안

알렙은 땅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헬멧의 렌즈로 기계장치를 확대해 보았다. 그러자 은색 테두리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LUX

א

아랫줄의 문자는 고대 지구의 히브리어 첫 글자 '알렙'이었다. 그리고 알렙의 이름 이기도 했다. 그리고.. p. 66


빛의 딸 알렙... p.80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가 책을 좋아했으면 싶어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자꾸 책을 거부한다. 그림책만 읽더니, 유튜브 스타들의 캐릭터가 들어간 만화책을 사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글줄이 좀 많은 책을 이리저리 권하면 아예 읽지 않거나, 억지로 끝까지 읽긴 하지만 '재미가 없다'라는 평으로 끝나곤 했다. 혹시나 읽을까 싶어 온라인 서점에서 한참 베스트셀러였던 '전천당'도 들이밀어보고, 고양이를 좋아하니 고양이 나오는 동화책도 권해 보았다. 이제 사춘기가 오고 있으니 성에 관한 책도 사줘보고, '사랑이 훅'같은 책도 은근히 아이 책장에 꽂아두었지만 펴보지도 않은 듯했다.


공부머리 독서법을 쓴 최승필님이 '부모가 책을 읽으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말'이라고 하셔서 꽤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아이 보여주려고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읽으면 언젠가 아이도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없던 시절에는 책을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부모가 책을 읽어도 굳이 같이 책을 읽지 않은다고 최승필님은 말하셨다. 그 말이 맞는 말 같아 좌절했다.


주말 아침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길래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억지로 읽히는 일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 아직 어린 둘째가 그림책을 꺼내서 본다. 아빠도 책을 읽으니 텔레비전도 심드렁해졌는지 책은 질린다던 첫째 아이가 책을 읽겠단다. 나는 냉큼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청소년 작가 '최영희'님의 '알렙이 알렙에게'를 권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읽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꼭 읽으라고 하는 책만 겨우 읽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쭉쭉 읽어 나가는 것이다. 정말 재미있단다. 뒤의 내용이 궁금해서 읽지 않을 수 없다며 토, 일 후루룩 책을 읽었다. 그리고 답답해한다.


"아니 끝이 이러면 어떡하냐고,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하잖아. 엄마 이거 뒤편은 없어? 엄마는 이거 읽었어?"

"아니 아직 안 읽었어. 왜? 재미있었어?"

"응 정말 재미있어."


그 말을 듣고 아이와 공감대 형성을 위해 읽던 책을 옆에 두고 '알렙이 알렙에게'를 먼저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읽었는지 알겠다. 책이 술술 넘어간다. SF 판타지에 추리가 더해지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지구가 멸망하고 인공지능 우주선이 딱 200명을 데리고 지구형 행성인 테라에 도착한다. 지구형이지 온전히 지구는 아니기에 인공지능인 '마마'는 돔을 형성하고 200명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살아간다. 연애는 하지만 자손 번식은 되지 않는다. 돔 안에서 관리될 수 있는 인원은 딱 200명 그러므로 마마는 DNA 복제를 통해 이전 사람이 죽으면 똑같은 사람을 만든다. 돔 안에는 사냥조, 이끼조, 보육조, 세탁조, 교육조 같은 인원으로 분리되어 일을 하며 인공지능 마마는 돔 안의 일을 모두 보고 있다. 그러니 돔 안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마마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 '사냥조'만 빼고. 사냥조는 돔 밖으로 나가서 고기를 사냥해온다. 사냥조는 돔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말할 수 없다.


주인공 알렙은 이끼조로 테라 행성을 지구처럼 만들기 위해 이끼와 민달팽이를 연구하고 키우는 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알렙은 사냥조에 들어가고 싶어서 시험을 보고 사냥조에 들어간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알렙이 돔 바깥세상이 궁금해서 사냥조에 들어가게 되고, 사냥조 활동 첫날부터 그동안 마마로부터 전해 들은 지식에 대한 '왜?'라는 물음이 시작된다.


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는 조에 아줌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침묵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침묵보다 어려운 건 가슴 깊은 데서 차오르는 ‘왜?’라는 질문이었다. 대체 왜? 왜 마마는 새로운 지식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왜 마마는 사냥꾼 선서 셋째 조항을 만든 걸까? P. 63


알렙은 묻고 싶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지구가 어쩌다 멸망했는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왜 어둠에 싸인 지구에서 도망쳐야 했는지... 그러나 그 물음들은 ‘마마의 벽’ 너머의 것이었다.


그 순간 번번이 알렙의 생각을 가로막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껏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은 죄다 마마가 가르친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마의 가르침이 곧 진실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마돔에 200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그 역시 마마의 뜻이었다. 결국 알렙의 생각을 가로막은 건 마마였다. p. 92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밝히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로 부릅니다.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호모 사피엔스는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가슴속에 '물음표'를 담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주민을 학살해도 되는가? 생태계의 일부인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포획해도 되는가? 인간이 정말로 이 세계의 주인인가?'(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알렙이 알렙에게'는 이런 물음표에 관한 작가의 고민과 현명한 합의점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SF, 추리 스릴러의 전통적인 규칙을 따르면서도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1984(조지 오웰)'에서 고민하는 지점을 명쾌하게 다룬다. 거기다 제국주의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테라 행성에 원래 살고 있던 동물과 오래전 지구에서 사라진 도도새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것도 놀라웠다.


책을 읽으며 이어진 생각은 끝으로 인공지능 '마마'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책의 한 챕터는 '마마의 벽'이다. '마마'는 영어이고 한국어로는 엄마이다. 인공지능 마마는 어린아이들의 보호자를 닮아있다. '마마'를 어떤 잣대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마'는 자기가 생각하는 200명의 인간을 보호하고 계속적으로 살리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것이 다 옳지 않은 것은 맞지만, 마마의 프로그램 안에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모두를 돌보는 인공지능 마마 돔이라는 명칭으로 지정하면서, '물음표의 시작은 부모에게'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부모와 아이는 다르다. 아이는 부모의 벽을 넘어야 돔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물음표의 시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책이 싫다'라고 말하는 아이가 빠져들게 만드는 재미가 까지 있게 만들다니. 그동안 아이와 함께 읽기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 책을 몇 편 읽었지만 이렇게 우리 둘다를 만족시킨 동화책은 없었다. 아이는 신나는 모험 안에서 호모 사피엔스, 룩스 같은 단어들의 정확한 정의를 알게 되며 좋아했다. 도도새가 사라진 것을 아느냐고 흥분해서 나에게 물으며 함부로 동물을 잡아 먹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와 지구, 인간에 관한 어른들이 읽는 책의 내용을 작가가 쉽게 풀어낸 내용을 찾으면 '이미 알고 있는 지루한 이야기네라던가 어린이 대상이라 깊이가 부족해 '라는 생각 보다는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아이가 다 이해는 못한 것 같지만 마음에 무언가가 생겼겠지'하며 이상하게 신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에서 다양한 존재들이 화해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악몽은 알렙이 날 죽이고 끝나거나, 내가 알렙을 죽이고 끝나도록 설계되었지만 난 나도 살고 알렙도 살릴 거라 했어. 왜냐하면 난 사람이니까. 게임의 룰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고 네 친구니까. 넌... 이 마마돔에 어쩌면 테라행성 아니 이 우주에 하나뿐인 친구니까. p.96


“알렙, 두려움과 편견을 걷어 내면 단순한 원리가 보인단다. 돔 밖으로 나가서 이끼와 바람과 친구 하며 지내렴.”p. 102



후편이 없다니까 아이가 다른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란다. 최승필 작가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난 아이에게 책 읽히기는 쉽지 않지만 딱 한 권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 책을 엄청 읽을 것처럼 하던 우리 집 아이는 금세 시들해졌다. 최영희 작가의 다른 책, 요즘 인기 있는 다른 책 등을 권해 봤지만 '응 읽을 께.'하고는 옆으로 치워두고 다른 걸 하고 있다. 역시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책이 유튜브를 이기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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