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상쾌할 거야

면도날(서머싯 몸: 민음사)

by 릴리안

하지만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건 틀림없어요. p.459


등장인물은 미국에서 사는 아름답고 발랄한 20대의 이사벨, 이사벨의 약혼자 래리, 래리의 친한 친구이면서 이사벨을 사랑하는 그레이 그리고 그들의 친구 소피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엘리엇이라는 이사벨의 외삼촌을 통해 주인공들을 만난 서머싯 몸 작가가 기술한다. 발랄하고 아름답고,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될지 아직 정해지지 청년들을 서머싯 몸이 긴 세월 동안 띄엄띄엄 만나면서 보아온 성장 기록이다. 책의 첫 문장을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시작했을 때 당연히 작가가 만들어낸 책 속 작가가 나타나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몸’ 작가님이라고 부르고, 자신이 명성을 얻은 작품이 ‘달과 6펜스’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하니 마구 헷갈렸다. 이건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가 분명한데 어쩌면 진짜 있던 인물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몸'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작가의 관찰 시점으로 이야기가 서술되다 보니, 읽다 보면 서서히 서머싯 몸의 열혈팬이 되어 가게 된다. 수필을 아주 잘 쓰는 작가의 책을 읽거나, 연기를 너무 잘해서 진짜 인물같이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를 볼 때, 그의 글이나 내용이 나의 마음을 울리면 그 사람이 마치 내 친구 같아지는 느낌을 ‘면도날’을 읽으며 똑같이 느꼈다. 작가가 재기 넘치는 유머나, 위트가 보일 때마다 ‘아 멋져. 몸 작가는 진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며 살지 않았을까?’하면서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책 속에서 만들어내는 사람의 얼굴 묘사나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 등장인물과 나누는 지적 대담 같은 부분을 읽고 있으면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도 햇살이 비치는 잔디밭을 보았을 때 저런 마음이었을 거야.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을 묘사할 때 저렇게 기록해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책 속의 작가처럼 날카로우면서 세련되게 말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한번쯤 팬 사인회라도 가고 싶게 한다. 소주 한잔 하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 많이 배우고 많이 통할 것 같다.


‘면도날’은 ‘파타 우파니샤드’라는 사람이 말한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리라.’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되어있다. 책의 초반에서 ‘몸‘작가님이 말씀하셨듯이 기본적으로 이 책은 몸 작가의 지인인 엘리엇의 조카 이사벨의 약혼자인 래리의 성장에 관한 소설이다. 래리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대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10대 시절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돌아온 20살 초반의 래리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이사벨’과 결혼을 약속하지만, 대학도 그만두고 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리고 갑자기 2년 정도 파리에서 공부하고 오겠다고 하며 결혼을 미룬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거의 20여 년간 기록된다. 20살에서 40살이 되는 사이에 그들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계속 떠다니게 된다. 래리는 세상에 보이지 않은 자신도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공부한다. 그리고 이사벨과 그레이는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나라의 성장과 눈에 보이는 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래리가 동거하게 되는 수잔은 가난하고 힘든 태생 속에서도 남들과 다른 억척스러움으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획득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 모두의 친구인 소피는 아름다운 꿈과 맑은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운명의 배신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다.


면도날은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이라 여러 가지 장점을 열거할 수 있지만, 그중에 가장 자랑하고 싶은 부분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마음이나 상황, 성격, 추구하는 목표를 균등하게 옹호하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망가진 소피를 만나고 난 뒤 이사벨과 래리가 소피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이나 작가가 엘리엇의 성품을 설명하는 문단과 비슷한 장면이나 작가의 생각이 자주 등장한다. 한 사람, 사건, 시대를 보는 다양한 시선을 만나게 되어 세상을 보는 시야가 한 뼘 더 넓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삶의 모든 모습을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되게 한다.



“난 아닌데. 물론 충격적인 일이죠. 저만큼 소피를 가엽게 여겼던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겪고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고요. 소피가 그렇게 망가진 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천성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밥에 대한 사랑도 좀 지나쳤잖아요. 만약 품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죠.” p.327 소피에 대한 이사벨의 생각

“연민과 대의도 느껴졌고, 당시 소피는 사회사업가가 되고 싶어 했지!. 감동적이었어. 희생하고자 하는 열망 말이야. 난 소피가 아주 유능한 여자라고 생각해. 어리석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았지. 그보다는 귀여운 순수함과 기묘하리만치 고매한 영혼을 가진 여자였어. 그해에 우린 꽤 자주 만났지. “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비쩍 마른 소녀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감동받아 떨리는 목소리로 아름다운 키츠의 시를 읽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 소녀는 어디로 간 걸까? “p. 330 래리의 기억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p. 208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속물인 엘리엇이 또한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배려 깊으며 마음이 넓은 남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 223


책을 읽고 있는 있노라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점점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를 생각하게 된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아직 정확한 답은 없다. 작가가 말한 래리의 성공처럼 ‘행복’을 달성하고 싶긴 하지만 래리처럼 살기에는 버리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책이 만들어 낸 적절한 균형은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성공 목표나 꿈을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처음 내가 인용한 문장으로 돌아가서. 읽는 도중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은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붙인 포스트잇이 꽤 많았다. 포스트잇을 떼며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건 틀림없어요.”라는 래리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저 말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달과 6펜스’는 오랜세월 하나의 꿈을 향해 걸어간 장인정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면도날’은 지금 20대 청년들이 질풍노도의 마음에 무언가를 주고 싶은 어른의 넓은 마음이 들어 있는 책이었다. 물론 엄청난 변화의 시대를 사는 40대의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력에 보면 1944년 59살의 나이에 책을 출판했다고 되어있다. 그럼에도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는 멋진 눈을 가지고, 젊은이라면 응당하게 되는 고민들을 잔소리하는 느낌 없이 잘 풀어쓴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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