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무사히 늙어가기를

그냥 사람(홍은전 지음:봄날의 책:2020)

by 릴리안

어린 시절의 각인이란 정말로 강력해서 나는 여전히 내 고향의 화력발전소가 아름답다. 24시간 멈추지 않는 그 발전의 동력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서울은 여전히 유혹적이다. 그러니 이 도시의 불빛을 좇아 온 수많은 ‘나’들이 저 무시무시한 지하 세계의 문을 여는 일에 일조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 73


한참 모든 것이 싫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친구가 사진 수업을 권했다. 항상 만나던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무언가를 하면 좋을 거라고 자신이 그러했다고 나에게도 도전해보라 했었다. 디지털카메라의 전문가용을 일반인들이 참 많이도 사던 시기라 나도 당시에 가장 저렴한 기종으로 하나 구입하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 소개에도 나와 있었기에 당연히 조리개 조절 방법 같은 기초적인 카메라 기술 부분부터 차근차근하다가 수업 막바지에 사진을 찍고 함께 합평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는 첫 시간에 무너졌다. 선생님께서 그런 건 책이나 블로그에 충분히 나와 있다며 이 시간에는 매주 선생님이 내어주는 과제의 사진을 수강생들이 찍고 그 사진을 보고 이야기는 나눌 거라고 하셨다. (중간중간에 기본적인 카메라 조작방법도 조금씩 알려 주셨다.)


프레임 안에 나의 어떤 것을 넣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냥 좋아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이 사진을 찍었느냐가 상당히 중요했다. 그러면서도 보는 사람이 어색하지 않게 수평과 수직의 구도를 잘 잡아야 한다. 수업을 들으며 가장 많이 깨달은 점은 내가 찍은 이유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프레임안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였다. 매주 과제가 주어지고 그 과제에 관한 내가 생각하는 무언가를 이미지로 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고, 역시나 매 시간 혹독한 합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주 수요일이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나의 프레임이 조금씩 군더더기가 없어지는데,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못 견디게 좋았다.


그냥 사람은 홍은전님이 노들야학의 일을 그만둔 후 5년간의 기록이다. 책의 내용도 2015년에서 2020년으로 작가님이 칼럼을 쓴 순서대로 흘러간다. 한 꼭지 꼭지도 의미가 있지만 천천히 흘러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홍은전님의 프레임을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노들야학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시설에 갇혀있는 사람들, 세월호, 작가님 집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개발로 이어진다. 그렇게 작가님의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어 2020년에는 동물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 숨겨지고 잊힌 다양한 이야기가 사진 찍혀서 나오지만 작가님이 말하고자 하는 프레임안에 주제는 군더더기가 없고 직시적이다. 이야기는 짧은데 한쪽 한쪽이 쉽게 넘어가지 않아서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한쪽을 읽고 나면 다음 쪽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었다. 글이 어렵지 않지만 한 꼭지 꼭지 작가님이 보여주는 세상이 나를 많이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야 할 세상이니까. 그리고 책을 읽는 막바지에 모든 것이 싫어져 새로운 것을 찾아 사진 배우러 다녔던 '시절의 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작가가 보여주는 프레임은 내 안에 없는 프레임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작고 편협한 프레임을 끊임없이 깨 주고 있었다. 이제 다시 내가 사진을 찍는다면 조금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님이 가지고 있었다는 어린 시절 각인 같은 것들이 내 안에도 있었고, 한 페이지씩 읽어낼 때마다 그런 각인들이 조금씩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떨어져 나갈 때마다 아팠다. 내가 보지 못했던 많은 지나온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울 지하철 신길역에서 한경덕 씨가 사망했다.... 왼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는 왼팔을 쓰지 못했다. p. 147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채 무대 위에 오른 화상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면 좋겠다. 이들이 바라는 건 무지하고 무례한 시선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바뀌어야 할 것은 갇힌 자들이 아니라 가둔 자들이다. p. 162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에 스물네 살은 미안하지만 좀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를 고치는 사람이 되려고요.” p. 190



중간중간 작가님은 함께하기를 촉구한다. 작가의 생각을 넓혀준 많은 영화와 책, 시위 현장들을 공유한다. 그럴 때마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검색해본다. 그러다 작가님이 이 글을 쓸 때는 살아계셨던 한 분이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2015년부터 있어왔던 변화를 위한 발걸음들이 2021년에 찾아본 나에게 씁쓸한 경우가 많았다. 5년 전, 4년 전 작가님이 변화를 바라며 썼던 칼럼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을 때, 추천해준 영상이 유튜브에서 구독자수가 너무 소수임을 볼 때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끊임없이 행동하고, 글을 쓴다. 그것이 나도 행동하게 만든다. 책을 천천히 읽으며 연관된 자료들을 검색하고, 달려 나가지는 못했지만 작가님이 알려주신 곳들에 기부를 했다.


작가님의 세계는 노들야학을 나와서 세상을 만나면서 더 확장되었다. 이제 그녀가 고민하고 바꾸고자 하는 세계는 넓어졌다. 작가님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모두가 무사히 늙어가는 세상.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갑작스럽고 당혹스럽게,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일찍 죽어간 사람과 동물들을 만났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글로 읽으며 나도 작가님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모두가 무사히 늙어서 죽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고 어디에선가 보았다.... 나에게도 그런 동그란 빈자리가 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고 동시에 진정한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충분히 애쓰는 존재들을 보면 시큰시큰 아파오는 자리. 세상엔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은데 다정함도 그중 하나임을, 세상엔 필요한 권리가 참 많은데 ‘자매가 함께 무사히 할머니가 될 권리’도 그중 하나임을 알았다. p. 145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는 마음은 광장에서 미경 씨의 머리를 밀어주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던 여정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슬픔을 맡겨주는 것이고, 나는 되도록 그 떨림과 두려움을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p. 213


세계를 감각하는 동물적 능력을 키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내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더 많은 ‘새벽이들’이 무사히 늙어가는 세계를 현실에서 짓고 싶기 때문이다. 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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