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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의 온기

에필로그

by 김경희

冊이라는 한자어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저 ‘책’이라고 부르면 되건만, 굳이 한자로 써보고 획 하나하나를 눈으로 더듬다 보면 마음속에 오래된 풍경이 펼쳐진다. 낡고 바랜 표지의 고서, 바람에 흔들리는 창호지 너머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한지의 감촉, 그리고 그 앞에서 책장을 넘기는 느린 손짓. ‘冊’이라는 글자는 나에게 단지 지식을 담은 물건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과 마음의 태도를 불러오는 마법 같은 존재다.


‘첵이 되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는 건,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기록을 복원하듯, 내 안에 묻힌 시간과 감정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꺼낼 때도 머뭇거렸고, ‘이런 이야기가 과연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곤 했다. 또 부끄럽기도 했다. 글이란 결국 자신을 꺼내 보여줘야 하니까. 벌거벗은 마음을 조심스레 활자에 담아내야 하니까.


이런 과정은 종종 고독했고, 때로는 너무 적막해서 호흡 소리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늘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있다. 바로, 남편이다. 나는 글을 쓰다 자주 멈췄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마치 녹슨 시계에 기름을 칠하듯, 부드럽게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괜찮아, 당신의 속도로 가.”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속도를 내지 못할 때, 조용히 기다려줬고, 반대로 글이 쏟아져 나올 때는 묵묵히 옆에서 받아 적어주듯 나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글은 온몸으로 쓰는 일이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어야 글이 나온다. 그러다 보면 허리가 아프고 목과 어깨, 등까지 뻐근해진다. 자판을 두드리는 팔목과 손목은 시큰거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마다 남편은 글의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불러내 스트레칭 시켰고, 집안에 매달리기 할 수 있도록 철봉을 설치해 주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산책길로 끌고 나가 한 시간 반이 넘도록 함께 걸어 주었다.


남편은 도서관에 갈 때도 동행해 주었다. 나는 필요한 자료를 찾았고, 그는 조용히 옆에서 글을 썼다. 각자의 원고를 쓰며 책상 하나 나눠 쓰는 시간은, 말없이도 함께 호흡하는 어느 오후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때로는 책 한 권 꺼내 읽으며 감탄하는 나를, 그는 고개 들어 쳐다보았고, “좋은 문장이야?”라며 속삭였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건 나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우리는 늘‘이야기’를 품었다. 걸으면서 말하고, 듣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나누는 공감. 해변을 걷다가 문득 내가 꺼낸 글의 주제를 두고 그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의견을 건넸다. “나는 그게 이중적인 의미로도 읽히는 것 같아. 하지만 당신이 쓴다면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런 말은 나에게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혼자서 고요히 앉아 나를 마주하는 일이지만, 중간중간 누군가의 시선과 마음이 더해지면 글은 더 깊어지고, 더 멀리 나아간다. 남편은 나의 가장 가까운 독자이자 편집자였고, 가장 다정한 독려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첫 문장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마지막 원고를 저장하던 밤, 조용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을 멈췄다. 그리고 창밖을 보았다. 보면대 앞에서 남편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글은 결국 ‘우리’의 글이라고. 혼자 쓴 것 같지만, 그가 있었기에 완성된 글이라고.





冊.

다시 이 글자를 떠올린다. 지금 내게 책(冊)이라는 글자는 오래된 시간 너머에서 건너온 문명의 상징이자, 누군가와 함께 써 내려간 다정한 기록이다. 그리고 언젠가 冊이라는 글자처럼, 나의 책도 누군가의 시간을 불러오는 마법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울림을 남기는, 그런 한 권의 冊이 되기를.


『당신의 글도 책이 될 수 있다』라는 제목 아래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25년 넘게 살던 곳에서 생소한 지역으로 이사 오게 되었고, 일상은 끊임없이 변했으며, 잦은 여행으로 인해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원고 마무리는 늘 다음으로 미뤄졌다. 나 스스로도 알았다. 조금만 더 집중하면 끝낼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성이라는 문턱 앞에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고백하자면, 때때로 남편의 다정한 재촉마저도 버겁게 느껴졌다. “앞으로 시간 널널한데, 뭘 그렇게 서둘러요?”라는 말로 슬쩍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마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듯, 마무리는 언제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지난 달,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내년 3월에 만나러 갈게요. –뚜리- "딸이 건넨 초음파 사진과 짧은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진 속 조그마한 생명의 존재는 몇 줄의 글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에게 또 소식이 전해졌다. “뭐라고? 너희도 아기가 생겼다고? 그럼 엄마가 내년 3월에 외할머니랑 친할머니가 동시에 되는 거야?”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날 정도로 기쁘기도 했지만, 너무 놀라 정신이 멍해졌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하루 이틀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마무리해야겠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내년 3월이 오기 전, 원고를 내 손에서 떠나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어느덧 ‘널널한 시간’은 더 이상, 나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준비와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지금 이 책은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 다행히도, 글은 기다려준 만큼 내게 다가와 주었다. 문장을 다듬으며 지나간 시간도 함께 정리되었고, 초고를 저장하던 순간에는 잔잔한 뿌듯함이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


『당신의 글도 책이 될 수 있다』의 원고를 마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은, 한 권의 책을 품에 안은 작가이자 곧 두 아이의 할머니가 될 예비 할머니의 마음이다. 이 책이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마음을 품게 하는 문장’으로 남길 바란다. 그리고 내년 3월, 내게 올 두 생명처럼 따뜻하고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소망한다.


책의 온기를 전하는 마음으로

雅林 김경희



<참고 문헌>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2024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 2023

『나는 어떻게 쓰는가』 시네 21 북스, 2013.

『남의 일기는 왜 훔쳐봐가지고』 (㈜엔세임, 2020.

『톰 아저씨의 오두막』살림, 2018.

『1984』민음사, 2007.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나는 고발한다』책세상, 2007.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젊어지는 두뇌습관』프런티어, 2018.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다산라이프, 2011.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아시아, 2014.

『맛의 위로 』이비락,2023.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글쓰기의 기술, 표현의 철학』, 2024년 개정판)

『OWL 글쓰기 자료집』서울대학교 교육개발센터, 202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

『무소유』 범우사, 1976.

『소나기』문학사상사, 1953.

『꽃삽』 샘터사, 2001.

『칼의 노래』문학동네, 2001.

『문학이란 무엇인가』솔출판사, 2005.

『시학의 이해』 고려대학교출판부, 2002.

『시는 인간이다』 문학과 지성사, 2004.

『문학과 의식』 창비, 1991).

『오래된 정원』창비, 2000.

『문학과 문학비평』문학과 지성사, 1995.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2022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동네, 1994.

『문학 이론입문』 경문사, 1997.

『문학이란 무엇인가』 열음사, 1983.

『시학 개념의 새로운 이해』 울력, 2024.

『문예신서』동문선, 2005.

『소설의 이해』문예출판사, 1990.

『한국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 푸른 사상사, 2006.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문학과 지성사, 2010.

『한국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푸른 사상사, 2006.

『시의 언어와 구조』 문학과 지성사, 1999.

『시와 시학』민음사, 1993을 참조하였다.)

『문학과 의식』문학과 지성사, 1993.

『한국 현대문학의 문체 연구』 문학동네, 2015.

『문체론: 글쓰기의 예술과 철학』 교유서가, 2010.

『문학과 문학비평』 문학과 지성사, 1990.

『순수문학론』 태학사, 2005.

『이상의 시 연구: 오감도를 중심으로』 지식산업사, 2012..

『문학비평의 이해』문학과 지성사, 2001.

『롤랑 바르트, 텍스트와 독자』 소명출판, 2010.

『문학비평론』 창비, 2015.

『춘심이 언니』, 부크크, 2024.

『가만히 부서지는』문학과 지성사, 2018.

『너에게 묻는다』예담, 2005.

『소설가의 일』문학과 지성사, 2013.

『소설창작 수업』푸른 영토, 2024

『소설가의 글쓰기 수업』민음사, 2022.

『지금, 소설을 쓰는 일』창비, 2021.

『작가의 탄생』위즈덤하우스, 2019.

『소설 쓰기의 모든 것』이레, 2006.

『작가의 마음』리틀빅북스, 2018.

『책과 그림책 사이』창비교육, 2017.

『그림책의 모든 것』북뱅크, 2013.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 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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