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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Sep 13. 2022

비 오는 날의 나르시시즘(황태 콩나물 라면)


하늘의 먹구름 층이 두꺼워지더니 이른 아침부터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는 수많은 11자 모양을 긋고 있다. 창문을 여니 하늘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 심란한 마음도 잠시, 어서 우산 갖고 밖으로 나오라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비가 오면 나는 왜 이리 마음이 들뜨는지. 

잠시 망설였다.

‘지금 나갈까?’, ‘청소랑 빨래랑 하고 나갈까?'



즐거움을 뒤로 미룬다는 것이 때때로 힘들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세탁기 속에서 말끔히 씻은 옷가지들을 건조대에  널었다. 윙윙거리는 청소기로 먼지를 재빠르게 빨아들였다. 직장 생활을 하며 분주하던 때도 그랬지만 한가해진 지금도 주부이기에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다. 가사일을 하면서도 자꾸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그쳐버리면 어쩌나 조바심을 내면서.



말끔하고 단정해진 거실을 곱게 앉혀두고 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슬리퍼를 신었다. 신발장 안에 고무장화도 있지만, 비가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 날엔 슬리퍼가 제격이다. 우산꽂이에서 비닐우산을 골라 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하늘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투명한 우산 위로 “타닥타닥” “타닥타닥” 벌겋게 달구어진 솥에서 콩 볶아지는 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반바지 아래로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에 장대비가 꽂혔다. 아스팔트 위로 흠뻑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발가락을 적셨다. 먼저 내린 빗물은 개울물처럼 꿀럭꿀럭 소리를 내며 도로 위로 흘러갔다. 사춘기 몸살을 심하게 앓지 않았는데도 이유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홀딱 젖어봤던 지난날의 여중생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벅저벅 물길을 가르며 아파트 아래쪽으로 이어진 주택가로 내려갔다. 내가 사는  아파트 위쪽으로 올라가면 도회지의 비 오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파트 아래쪽 주택가로 내려갔다. 그쪽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골목길 때문이었다. 아랫마을 골목길은 내가 어릴 때 오고 가던 골목길을 닮았다. 그래서 더없이 정겹고 소박하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비 오는 날의 골목길은 크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준다. 나는 작고 큰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발목까지 적시며 걸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강아지가 닫힌  대문 밑으로 고개를 내밀며 컹컹 짖었다. 강아지 짖는 소리를 피해 더 내려가니 편의점이 나왔다. 편의점 앞으로 야트막한 웅덩이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세진  빗줄기에 웅덩이는 점점 더 큰 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웅덩이 안으로 걸어 들어가 두 발을 담그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웅덩이의 빗물은 발목까지 차올랐다. 두 다리를 번갈아가며 물장구 치는 꼬마 아이처럼 첨벙거렸다. 맞은편에서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학생이 오다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데 하는 짓이라곤 유치원 꼬맹이 같다고 느끼는 눈빛이었다. 아니 비 오는 날 이상해진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간 어린 사람에게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 무얼 사러 온  것처럼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무얼 사러 들어간 것이 아니었기에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눈에 신라면이  들어왔다. 라면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아까 그 남학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라면 한 개가 든 검정 봉지를 신나게 흔들며 걸었다. 그러다 나를 철부지 어린애 바라보듯 쳐다보던 남학생의 눈초리가 생각났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남의 눈에 철들지 않아 유치해 보이면 어떠랴. 나는 나의 유치함과 철들지 않음을  좋아한다. 잠시 퇴행하는 시간이면 어떠랴. 유치함은 내가 나에게 애착하는 시간이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인 것을.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os)라고 놀린다 해도 나는 수선화가  된 미소년이 좋다.






집으로 돌아와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을 갈아입고 편의점에서 사 온 라면을 끓이기  위해 달그락거렸다. 라면만 달랑 끓이는 것보다 이왕이면 이런저런 야채를 넣고  풍미 있는 라면을 끓이고 싶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대접하듯 정성스러운 황태 콩나물 라면을.



냄비를 약한 불에 살짝 달구었다. 적당히 달궈진 냄비에 올리브유와 들기름을 듬뿍  둘렀다. 물에 씻은 황태포 한 줌을 프라이팬에 넣으니 “치익!”하는 소리가 났다. 주걱으로 황태포를 저어가며 달달 볶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고소한 들기름 향이 집안을 휘감았다. 어느새 황태포는 냄비 안에서 노릇한 양복 입은 중후한 신사가 되었다. 여기에 화룡점정, 감칠맛을 자랑하는 새우젓 한 스푼을 야박하게 넣고 볶았다.

날씬한 콩나물 한 줌과 물을 넣고 끓였다. 냄비에서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다 이내 펄펄 끓어올랐다. 바스락거리는 라면 봉지를 잡고 거침없이 쭉 찢었다. 구불구불하면서도 딱딱한 라면은 알몸으로 꺼내 놓고 분말가루 봉지를 가위로  싹둑 잘라 냄비에 탈탈 털어 넣었다.



짭조름하고 매콤한 라면 수프가 황태랑 콩나물과 어우러져 끓어올랐다. 후각을 자극하는 익숙한 냄새가 나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이어서 오늘 요리의 주인공  라면을 넣었다. 면발이 힘을 빼고 부드러워질 때쯤 청양고추와 대파, 계란을 넣고  휘휘 저었다.



다 익은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들고 뜨건 김을 후후 불었다. 한 김 나간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입속으로 빨아들이니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저로 건더기를 한 입 떠서 먹었다. 뱃속까지 개운하게 해주는 황태 국물 맛과 콩나물의 아삭 한 식감이 입속에서 춤을 췄다. 비 오는 날의 나르시시즘과 황태 콩나물 라면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일 줄이야.






*주먹구구 레시피  <황태 콩나물 라면 끓이기>


재료: 라면 1 봉지, 황태 채 한 줌, 마늘 2알, 대파 1/2, 청양고추 2개, 콩나물 한  줌, 새우젓 1작은술, 달걀 1개, 올리브유 들기름 약간씩, 물 550CC


1. 황태 채 한 줌을 물에 씻어 촉촉해지면 적당한 크기로 잘라두고 마늘 두 알과  대파 반대, 청양 고추 2개를 송송 썰어둔다.

2. 콩나물 한 줌을 씻어서 물기를 빼두고 계란 한 개는 톡! 깨서 그릇에 담아둔다. 3. 냄비에 올리브유와 들기름을 적당히 넣고 황태가 노릇해질 때까지 달달 볶다가  새우젓을 작은 한 술 넣고 콩나물을 넣은 다음 물과 수프를 넣고 끓인다.(물은  550CC 넣는다)  

4.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고 면발이 익으면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 대파를 넣은 다 음 계란을 넣고 한 소큼 더 끓인다. 잘 끓인 콩나물 황태 라면은 상추쌈에 싸서 먹으면 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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