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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07. 2022

난 바다 출신이라고 (주방십우쟁론기)

8월의 햇살은 무척이나 지루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었는데도 한낮의 열기 그대로이니. 지루함에 이골이 난 부엌이 두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제 몸은 항상 텅 비어있어야 함을 알고 있는 냄비는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방바닥을 깨끗이 닦고 있다. 도톰한 식칼도 날렵한 코를 오똑 세우고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식칼은 자기 코가 날렵하면 날렵할수록 주인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 준비 다 됐어?”

등판이 넓은 도마가 냄비와 도마를 향해 퉁명스럽게 묻는다.

“에이 조금만 다정하게 말해주면 안 되겠니?”

도마의 거친 소리에 냄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받아친다.

“응. 난 이제 준비 끝이야.”

도마는 항상 그러는데 뭘 새삼스럽게 구냐는 듯 냄비를 다독거리며 식칼이 무심하게 대답한다.


“직직직”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부엌으로 60대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이 집의 안주인이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애호박을 꺼내더니 양파와 감자를 뒤 베란다에서 가져오고 마른 표고버섯을 물속에 풍덩 집어넣는다.

“뭘 하려는 거지?”

식칼이 국자를 향해 묻자 국자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녀가 밥공기에 된장 한 수저를 퍼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아 알겠다. 오늘은 애호박 야채 된장국을 끓이려나 봐”

눈치 빠른 냄비가 소리친다.






그녀가 애호박을 씻어 도마 위에 놓고 잘랐다. 애호박은 날씬한 몸매와 함께 연초록색 얼굴빛을 자랑하며 말했다. 애들아 나는 말이야 신원 농장의 드넓은 땅에서 자랐단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넓어. 새벽에는 맑은 이슬을 먹고, 한낮에는 따가운 햇볕으로 샤워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보호해 주는 초록빛을 띠게 되었어. 내 몸에는 비타민을 비롯하여 엽산, 칼슘, 철분, 칼륨 등의 영양소가 많아 사람 몸에 유익함을 준단다. 애호박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식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가 우중충한 감자 껍질을 벗겨내니 침묵으로 일관하던 감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칠흑같이 어두운 땅속에서 100일을 견뎌 냈는데 그동안 어찌나 답답했던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다행히 지렁이와 굼벵이가 땅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틈이 생겨 간간이 숨을 쉬긴 했지만, 언젠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흙가루가 입속으로 들어와 기침 때문에 한참을 고생했어요. 이런 고통을 견뎌내다 보니 제 몸이 하얀 전분으로 가득 차게 되었지요. 제가 지닌 전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랍니다. 종알대는 감자의 말을 집중해서 듣던 감자 깎는 칼이 감자에게 반한 듯 박수를 보냈다.


그녀가 이번에는 양파를 들고 발그레한 겉옷을 벗기니 양파의 하얀 알몸이 드러났다.

“아이 부끄러워라. 어쩌자고 이렇게 옷을 훌러덩 벗기는 거지?”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던 양파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감자가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선 반드시 겉옷을 벗어야만 한다고 하자 양파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내 알몸보다도 붉은 겉옷이 훨씬 영양가가 많아.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는 것 같더라고. 하기야 내 겉옷은 몸을 보호하느라 질겨져서 사람들이 먹기에 적당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는 어떤 재료와 섞이든 은은하게 단맛을 내주니까 된장국의 감칠맛을 좌우할거야."

감자와 애호박은 양파 말을 듣더니

“그래, 네 말도 맞는 것 같아.”

라며 맞장구를 쳤다.

양파는 잘릴 때마다 매운 향기를 그 녀의 눈 속에 힘껏 불어넣으며 제 알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했다.

“부끄러워하기는 감자도 이미 알몸인데 뭘.”

식칼이 양파의 벗은 몸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다음은 불린 표고버섯의 차례였다. 안주인이 물기에 젖은 표고버섯을 손아귀에 넣고 꽉 쥐어짜자 아프다고 아우성치던 표고버섯이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며 말했다. 저는 산에서 나는 고기나 다름없어요. 아니 어쩌면 소고기보다 사람 몸에 더 좋고 영양가가 많을 거예요. 저는 그늘진 곳에 세워진 떡갈나무껍질 위에서 자랐어요. 사람들이 거칠고 딱딱한 나무 위에 구멍을 뚫고 종균을 넣어주면 그 속에서 꼬박 1년을 기다려야 해요. 그러다 날이 따뜻해지고 습기가 몸을 촉촉하게 감싸주면 우리 표고들은 부쩍부쩍 자라서 순식간에 피어나지요. 아까 감자가 100일을 기다린다고 했는데 저는 자그마치 1년을 꼬박 떡갈나무 위에서 기다리거든요. 이런 기다림이 있었기에 제 몸에서는 소고기도 울고 갈 깊은 맛이 나오는 거예요. 애호박과 감자는 자기들보다 표고버섯의 맛이 한 수 높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질을 마친 야채들이 모여 있는 냄비에 안주인인 그녀가 찬물을 부었다. 감자도 양파도 표고버섯도 물이 차갑다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수영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처럼 호기심에 찬 얼굴로 냄비 안에서 몸을 둥둥 띄웠다. 서로가 최고의 맛을 내는 으뜸 재료라고 우쭐대면서.


그녀는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코인 육수 세알을 넣었다. 코인 육수는 성형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몸에서는 멸치 냄새가 나는데 모습은 멸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동전 모양이었다. 성형미인이 된 코인 육수는 자기를 몰라보는 야채들 뒤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가 청양 고추도 2개 쫑쫑 썰어 넣었다. 애호박, 감자, 양파, 표고버섯의 말을 듣고 있던 청양 고추는 벌써부터 기가 죽어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청양고추에게

“너의 칼칼한 맛은 진짜 으뜸이야”

라며 도마가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웠다. 청양고추가 환하게 웃으며 냄비 속으로 미끄러졌다. 야채 조각들은 조그만 것이 들어오니 몸이 따갑다며 청양고추를 째려봤다.


냄비가 야채들을 다독거리며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녀가 된장 한 스푼을 냄비에 넣고 휘휘 저었다. 맑은 물이 금세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흙탕물처럼 뿌옇게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라며 야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된장은 야채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정말 가관이더구나. 된장국에 된장이 주인공 아니니? 어떻게 너희들이 내 앞에서 된장국 맛을 내는 으뜸 재료라고 자랑을 할 수 있는지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더구나. 감자도 표고버섯도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너희들보다 몇 천 배나 더 힘든 과정을 거친단다.”


일단 사람들이 봄에 심은 메주콩을 가을이 되면 수확해서 큰 가마솥에 넣고 푹 삶는단다. 삶아진 콩을 절구에 넣고 형체가 없어질 만큼 찧어댈 때 그 아픔과 고통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 그런데 고통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아. 메주로 만들어진 나는 처마 밑에 매달려 혹독한 겨울을 나면서 몸이 딱딱하게 마르거든. 너무 딱딱해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소금물이 든 독에 넣고 몇 날이고 뜨거운 햇볕을 쪼이게 해. 소금물은 또 어찌나 짠지 눈이 따갑고 몸이 쓰라려서 죽을 지경이야. 그런 소금 물속에서 딱딱했던 몸이 부드럽게 되면 컴컴한 단지 속으로 다시 옮겨 가게 돼. 그런 다음 내가 노랗게 익으면 사람들이 퍼다 된장국을 끓이는 거야. 이처럼 기나긴 인고의 세월과 고통을 견뎌낸 나는 그야말로 된장국에서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될 주인공인 거야.”


된장이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며 치를 떨면서도 거만하게 으스대자 애호박, 감자, 양파, 표고버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야채들은 싫은 척하지 못하고 된장의 말을 받아들였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된장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재료 손질을 마친 그녀가 전기레인지 위에 불을 켰다. 냄비가 서서히 데워지더니 된장국물이 보글보글 끓는다. 애호박과 감자, 양파, 표고버섯은 제 몸에서 맛을 뽑아내느라 뜨거워진 된장 국물 속을 신나게 헤엄쳐 다녔다. 청양고추도 감자 뒤를 따라다니며 촐랑거렸다. 이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된장은 한껏 잘난 체를 하며 모든 야채들을 무르게 했다. 야채들이 지친 모습으로 변해갈 때 그들 가까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철썩철썩. 쏴아.”

귀를 쫑긋 세우던 애호박이 말했다.

“누구지? 누구기에 이렇게 파도 소리를 내는 거지?”

감자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우리 주변에서 파도 소리를 내고 있어”

라고 말했다.

순간 갑자기 표고버섯이 소리쳤다.

“와 소금이야. 소금이 우리 모두를 감싸면서 파도 소리를 내고 있어.”

표고버섯의 말에 눈을 크게 뜨던 양파가

“소금이 된장 속에서 빠져나왔나 봐. 소금이 없었다면 된장이 제맛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양파의 말을 듣던 된장이 실눈을 뜨고 소금을 바라보았다.

자기를 알아보는 표고버섯과 눈을 맞추던 소금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나는 저 넓은 바다에서 왔어. 짙고 푸른 바다가 내 고향이야. 나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았어. 고래도 내 친구고 상어와 바다표범도 내 친구야. 나는 부모 형제 친구들과 늘 웃으며 행복하게 지냈어.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날에는 무용수처럼 춤을 췄지. 그러다 거센 태풍이 몰아치면 바위를 힘껏 내리치며 성난 파도가 되어 달려들기도 했어. 변화무쌍한 나날을 즐기는 바다가 얼마나 멋지고 넓은지 너희들은 감히 상상하지 못할 거야. 또 깊고 푸른 바닷속에 산호가 둘러진 운동장에서 말미잘, 불가사리와 함께 진주를 굴리며 놀기도 했어.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과 친구들이 있는 바다를 떠나 지금은 비록 이 작은 냄비 속에 녹아 있지만 나는 언제나 드넓은 바다를 그리워하며 지낸단다.”


소금은 눈물을 글썽이며 염전에 갇혀 소금이 되던 과정과 그때 겪은 고통에 대해서 얘기했다. 소금이 된 후로는 부뚜막 위에서 언제나 음식 속으로 뛰어 들어가 녹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라는 성경 구절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소금이 말을 마치자 냄비 안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모든 야채들이 소금을 향해 진실한 마음으로 고개 숙였다.








주먹구구 레시피 <애호박 감자된장국>


재료: 감자 1개, 양파 1개(중간 크기), 호박 1개 (중간 크기), 마른 표고버섯 3장, 동전 육수 3알, 청양고추 2개, 물 1200 cc, 간 마늘 1 큰술, 액젓 1 큰술


1. 애호박, 감자, 양파, 표고버섯은 손질해서 깍둑썰기로 잘라준다.

2.. 냄비에 야채들을 담고 집 된장을 한 스푼 넣어준다.

3. 물 1,200cc를 넣은 다음, 코인 육수 3알, 청양고추를 넣고 끓이다 간 마늘을 넣고 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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