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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06. 2022

푸근한 모순(더덕 구이)


난장판이었다. 아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여니 신발이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있었다. 구두 한 짝이 운동화 두 짝 사이에 들어가 앉아있었고, 슬리퍼 한 짝은 뒤집어져 있었으며, 다른 한 짝은 구두 한 짝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세상에나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현관이 이게 뭐람.’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님에도 놀라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신발을 반듯하게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이 삐뚤빼뚤 겹쳐 있다. 컴퓨터 본체와 책꽂이, 책상 맞은편에 놓인 2단 서랍장 위에는 곱게 분칠한 새색시 얼굴처럼 하얀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집에선 그저 잠만 자고 빠져나갔는지 침대 위의 이불은 구겨진 편지지처럼 이리 접히고 저리 접혀있다. 옷장은 텅텅 비어있는데 스탠드 옷걸이에는 셔츠와 바지가 수북이 걸려있어서 얇은 천 하나만 더 얹어도 이내 쓰러질 것 같다. 


어질어진 아들 방을 보면서 “여보 내가 와서 날마다 치워줘야 할까 봐.”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남편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이렇게 살아도 아무 이상 없다며 톡 쏘아붙인다. 


이런 난장판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서 팔을 걷어붙이고 먼지부터 닦았다. 가을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수건과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청소기를 돌린 다음, 냄새나는 화장실도 구석구석 닦아내니 호텔처럼 번들거렸다. 남편과 둘이서 청소업체 직원이 된 것 마냥 한참을 쓸고 닦고 했더니 그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청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아들이 돌아왔다. 녀석은 대학 시절 자취 초기엔 내가 청소를 할라치면 화를 냈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놔두라면서.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정리정돈에 청소를 일삼는 나에게 “속이 후련할 만큼 마음껏 치웠어?”라며 웃었다. 무엇이든 자식을 위해 해주고픈 어미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청소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엔 이른 시간이라 잠시 쉬고 있는데 양말을 벗는 아들의 엄지발톱에 까맣게 멍이 들어있었다. 

“이거 왜 그래?” 

놀란 표정으로 물으니 별거 아니란다. 편한 옷을 입겠다며 바지를 갈아입는데 무릎은 또 언제 다친 건지 붉은 딱지가 넓게 앉아있었고 딱지 주변으론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뭔 일이야 도대체.” 

“누구랑 싸웠니?” 

“누구한테 맞았어?” 

속사포처럼 계속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녀석은 그냥 별거 아니라는 대답만 했다. 


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서 남편이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아빠와 맥주잔을 기울이던 아들이 분위기 탓인지 그제야 아까의 질문에 대답했다. 선배들이랑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발이 다쳐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걸어오다 넘어졌나 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얼마나 많이 마셨기에 이렇게 많이 다치던 순간조차 기억하지 못했을까. 이만하기 다행이지 더 큰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찌했을까. 문득 별별 상상이 다 되어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왔다. “그러다 몸이라도 크게 상하면 진짜 어쩔래.” 내 잔소리에 “엄마! 술 마시는 것도 실력이야.”라며 능청스럽게 웃는 녀석을 보며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청춘들의 음주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술과 함께 어우러지는 취기 어린 분위기는 서로를 순식간에 가깝게 해준다는 것도 안다. 술만큼 짧은 시간에 사람의 몸을 달구어 마음까지 활짝 열어 주는 음식이 어디 있을까. 그저 자나 깨나 자식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는 어미의 마음이 한발 앞서는 것일 뿐. 아들과 하루 저녁을 같이 보내고 모임에서 술 좀 제발 적당히 마시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돌아왔다. 






며칠 뒤 시장에 갔더니 수더분하게 생긴 아저씨가 더덕을 팔고 있었다. 쌓아놓은 더덕 무더기에서 산속의 청량한 숲 내음이 났다. 더덕은 마른 흙을 잔뜩 묻힌 채로 온몸에 잔주름이 가득했다. 잔뿌리도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더덕을 보며 왠지 잔주름과 잔뿌리의 숫자만큼 약이 될 것 같았다.  

“더덕 좀 살까?”  

“더덕 까기 힘들다고 당신이 싫어했잖아.” 

“아니, 그냥 껍질 안 까고 깨끗이 씻어서 술 담그면 되지 뭐.” 

“술을 담그겠다고?”  

“응. 더덕 주 담아놓았다가 아들 오면 주게.”

남편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들이 술 먹는 것을 그렇게 걱정했던 엄마가 맞느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이상했다. 술 마신다고 걱정하는 마음 뒤로 술 좋아하는 녀석을 위해 더덕주를 담그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말이다. 남편을 졸라 더덕을 2만 원어치 사 왔다. 거뭇거뭇한 색깔에 잔주름과 잔뿌리가 가득한 더덕을 어찌할까 한참 고민했다. 더덕 주를 담그려면 껍질을 벗기지 말아야 할 것이고 더덕구이를 하려면 껍질을 벗겨야 했으니 말이다. 


 일단 흐르는 물에 솔로 문질러 더덕을 깨끗하게 씻었다. 시커먼 구정물이 한없이 나왔다. 말끔하게 씻긴 더덕을 두 무더기로 나누었다. 한 무더기는 어미의 모순된 마음으로 더덕 주를 담기 위해 물기를 말렸다. 투명한 유리병에 더덕을 넣고 30도짜리 독한 소주를 사다 콸콸 부었다. 뚜껑을 꽉 틀어막아 잘 익으라고 그늘진 베란다에 곱게 앉혀 두었다.


나머지 반은 더덕구이를 하기 위해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쳤다. 데친 더덕을 바로 찬물에 넣은 뒤 껍질을 까니 돌돌 잘 벗겨졌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 더덕을 도도마 위에 얹어놓고 반으로 잘랐다. 머리 부분에서 찐득한 하얀 진액이 나왔다.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드리니 더덕이 너덜거리며 납작해졌다. 고추장에 갖은 양념을 넣고 빨갛게 무쳤다. 팬에 들기름을 넉넉히 두른 뒤 양념한 더덕을 약 불에서 지글지글 구웠다. 고추장 양념이 들기름에 볶아지는 냄새가 매콤해서 코끝이 간질거렸다. 다 구워진 더덕구이는 말캉하면서도 마지막에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남편이 더덕구이를 먹으면서 베란다에 막 담가둔 더덕 주를 보며 이죽거린다. 우리 각시는 참 이상한 엄마라며. 


아들이 결혼하고 제 아내와 함께 집에 내려온 날, 더덕을 사다가 고추장 구이를 했다. 아들과 남편은 매콤하면서도 아삭한 더덕구이를 안주 삼아 더덕주를 마셨다. 술 한 모금만 마셔도 공기 빠진 풍선이 되어 버리는 나와 며느리는 그저 더덕 주에서 풍겨오는 향기만 맡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워하는 아들에게 더덕 주에 담긴 나의 모순된 마음을 얘기했더니 녀석이 이런 마음도 유전인가 하면서 껄껄 웃었다. 아들은 결혼 후 제 아내가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져 과자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 놓고선 마트에만 가면 과자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거린단다. 그러다 결국 제 아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두 손에 고이 바친다고 하니 우리 모자의 마음 참 모순덩어리다. 






*주먹구구식 요리법<더덕 고추장 구이>


재료: 더덕 500g, 양념장 (고추장 2큰 술, 고춧가루 1큰 술, 양조간장 2 큰 술, 다진 마늘 1/2 큰 술, 다진 파 1/2 큰 술, 들기름 2 스픈, 꿀 1큰 술)

1. 더덕은 씻어서 뜨거운 물에 30초 데친 뒤 찬물에 담근다.

2. 껍질을 까서 반으로 자른 뒤 방망이로 살살 두드린다. 

3. 양념장을 넣고 조심스럽게 버무린 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약 불로 지져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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